모성적 생명의 눈으로 한국 장로교회 역사 읽기

[ 여전도회 ]

임희국 교수
2013년 09월 27일(금) 11:11

1. 구한말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생명의 이치를 깨친 여성들
 
조선시대의 여성 대다수는 가장권(家長權)이 절대화된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사회질서 속에서 살았다. 이 제도와 질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사회가 유지되는 가운데서 유교적 통치이념인 충효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요즘에 인식되는 '사람의 권리'에 대한 의식이 전반적으로 희박했고 더욱이 여성의 인권은 전혀 무시되다시피 했다. 1880년대 조선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이 땅의 여성이 살아가는 모습은 양면적이었다고 한다. 먼저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사회질서 속에서 희생당하는 조선 여성의 삶이었고, 그러면서도 매우 부지런하고 강인하며 유능한 자질을 가졌다고 보았다. 선교사들은 가부장적 대가족전통의 폐해를 직시하면서 일부일처(一夫一妻)를 강조했고 이와 함께 조혼, 축첩, 여아매매 등을 없애도록 권면했다.
 
개신교 첫 세대의 여성에게는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로 나오는 일 자체가 해방을 의미했다. 교회다니는 것은 집안의 담장을 뛰어 넘고 가부장적 가족질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교회다니는 여성은 이리하여 이제부터 엄격한 내외법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큰 해방은 문맹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봉건적 가족제도와 사회질서를 깨고 나오는 여성의 해방보다도 더욱 근원적인 해방이 신앙의 사건 안에서 일어났다. 예를 들어 1902년 1월에 경상북도 대구 근처의 한재에서 선교사 브루엔이 여성 1명과 소년 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선교사는 이 여성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 여성은 이제까지 자기 이름이 없는 존재로 살아왔다. 선교사가 세례받는 여성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각성하게 했다. 이 세례사건이야 말로 복음을 통한 사람의 변화요 조선 여성의 해방이었다고 이해한다.
 
2. 여성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된 교회여성
 
여성인권에 대한 의식은 여성의 학교교육으로 이어졌다. 선교사 멘지스(Miss Belle Menzies, 閔之使)는 어학 선생 박신연(朴信淵)의 도움을 받으며 여학교를 설립했다. 학교설립은 2년 전에 시작한 고아원 사역의 결과였고, 이 학교의 이름을 박신연이 '일신여학교'라 붙였다. 4년 뒤, 서울의 연동소학교(1898년 개교)가 여학생을 모집했다. 1908년 1월에 발간된 예수교 신문에 따르면, 여성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고리타분한 '구습을 버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문은 여성이 신학문을 아무리 열심히 배운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구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3. 일제 강점기(1910-1945),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교회여성
 
1) 여전도회 조직
 
평양의 여성들이 예수 믿고 교회를 다니는 가운데 스스로 조직체를 갖추는 자발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여성들이 교회에서 자치단체인 '여(성)전도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를 조직할 때 중심 역할을 한 이신행은 어느날 우연히 아들이 밖에서 들고 온 전도지를 받아보고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녀는 평양의 첫 교회인 널다리골(板橋洞)교회 교인이 되었다. 이신행은 여러 여성 교인들과 함께 복음전파를 위해 한 주일에 엽전 한 닢씩 모아 전도비로 사용하기로 했다. 1898년 이 교회의 여성 이신행·신반석·박관선·김성신이 발기인이 되어 여전도회를 창립했는데,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의 여성단체(회원 63명)가 조직되었다. 1928년 전국 11곳 여전도회지방연합회가 전국연합회로 창립되었을 때, 장로교 총회(제17회, 1928)가 여전도회전국연합회('조선예수교장로회여전도연합대회')를 법적인 기관으로 승인했다.
 
2)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개의 줄기: 기독교여성과 교회여성
 
1910년 8월 대한제국(한국)의 통치권이 일제에게 강제로 빼앗기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기독교 여성의 신앙의식이 민족의식으로 승화되었다. 기독교 여성들은 이제부터 일제에게 빼앗긴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 땅의 여성들에게 항일 민족의식을 불어 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결과, 기독교 여성들이 항일 결사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예컨대, 1913년에 조직된 '송죽회'는 평양 숭의여학교의 교사(황에스더,김경희)와 졸업생(박정석)이 조직한 항일 결사단체였다. 이들은 생일축하의 명목으로 함께 모여 구국기도회를 가졌고,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를 개최했고, 그리고 이 여성들이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그것을 나라 밖(예, 만주) 독립운동본부로 송금했다. 1923년 수 년 전에 항일 기독교여성단체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이(황에스더, 신의경, 김영순, 박현숙, 김합라 등)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를 조직했다. 이 연합회는 실력양성론에 기반을 두고 여성 계몽과 생활 개선(위생)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같은 해(1923)에 민족의식이 강한 기독교 여성들의 단체인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일본의 퇴폐문화가(중독성이 강한 술, 담배, 아편, 공창제도 등) 국내로 유입되어 민족의 혼을 혼미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1927년 5월에 기독교 여성운동단체(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가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인 '여성동우회'와 신념체계의 차이를 뛰어 넘어 하나로 합쳐서 '근우회'를 만들었다. 근우회 설립과 함께 여성자의식의 발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 단체는 봉건시대 여성차별의 관습이 아직도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사회변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근우회의 이념성향이 점차 사회주의에 편향되어 그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이에 기독교 여성들 다수가 이 단체를 탈퇴했다.
 
이처럼, 1910년대 이래로 교회 밖 사회에서 활동한 기독교 여성들은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여 여성 계몽과 사회 변혁을 위해 분투했다. 교회 안에서 활동한 교회여성들도 여전도회를 조직하여 헌신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활동한 여성단체의 성향과 성격은 교회 밖 여성 활동과 여러 모로 달랐다.
 교회여성의 활동과 관련해서 '전도부인'(Bible Woman)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도부인의 양성이 대략 1898년에 시작되었다. 전도부인은 교회에서 여성 교역자로 일했는데, 처음의 전도부인은 외국인(서양) 여성 선교사에게 한국어(조선말)를 가르쳤고 또 여성 선교사의 지방 순회전도에 동행했다. 조선에서는 관습에 따라 여성의 바깥 외출이 아주 어렵다는 점을 선교사들이 알고서, 선교사들은 그러한 여성의 전도를 위해 전도부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런데,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교육은 아주 단순했고 당장에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전도에 필요한 만큼의 간단한 성경지식을 배운 전도부인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여성에게 전도하게 했다.
 
전도부인양성과정의 교과목은 신구약성경ㆍ성경지리ㆍ구약역사 등이 주된 학습내용이었고 이와 병행하여 선교(전도)현장에서 쉽게 활용되는 쓰기(문맹퇴치)ㆍ산수ㆍ생리학ㆍ위생학ㆍ병간호ㆍ음식준비 등을 선택과목으로 개설했다. 선택과목의 내용과 성격이 실용적이었으므로 현장에서 당장 적용될 수 있었고, 그렇지만 교과목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이러한 교육과 훈련은 장차 전도부인이 얼마만한 역량으로 얼마만큼 일할 수 있겠는지 미리 예측하게 해 주었다. 즉, 교회에서 남성 담임목회자와 수평적인 동역관계로 교역한 것이 아니라 손발노릇하는 조력자(도우미)로 역할을 하는 전도부인이었다. 전도부인 대다수가 여성교역자로서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으로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그렇지만 그 헌신은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봉건주의 가부장적 관습을 깨트리지 못하고 도리어 여성교역자 스스로 봉건적 신분의식에 매몰되어 갔다.
 
이 점은 첫 세대의 교회여성들의 의식과 단절되기도 하고 계승되기도 했다. 첫 세대의 교회 여성에겐 교회 다니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해묵은 관습인 내외법에서 해방되는 것이었고 또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도 문맹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는데, 그렇지만 그 다음엔 이 단계에서 한 걸음도 진전해 나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여성은 -특히 전도부인으로 일한 여성 교역자는- 남성 목회자의 조력자로만 머물러 있게 됨으로써 또 다시 봉건시대의 관습으로 회귀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1933년에 장로교회 함경남도의 교회여성 104명이 연서로 이러한 봉건의식에 매몰된 교회를 갱신하고자 일어섰다. 이 여성들이 '여성치리권' 곧 여성도 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교회운영에서 남녀동등권이 실현되도록 법제화 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 청원을 그 노회가 받아들여 통과시켰다. 여성들은 계속해서 장로교회 총회(제 22회, 1933년)에게 "여자에게도 장로의 자격을 부여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총회는 장로교회 정치 제 5장 3조("장로의 자격 : 만 30세 이상 된 남자 중 입교인으로 흠없이 5년 이상을 경과하고 상당한 식견과 통솔력이 있으며, 딤전 3:1-7에 해당한 자로 한다")를 들어 이 요청을 허락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여성들은 총회의 이러한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듬해에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 639명이 6월에 열린 제 19회 함남노회에서 다시 한 번 더 여성의 교회치리권 청원을 연서로 제출했고, 내친 김에 여성에게도 목사의 자격을 부여하라고 청원했다. 이에 여성의 교회치리권에 대한 지면논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장로교회 총회는 여성 치리권을 지지하는 입장(김춘배)의 글에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고린도전서 14:33-34절에 대한 김춘배의 해석을 문제 삼았다. 김춘배의 글에 대하여 총회의 몇몇 총대들이 이것을 여권문제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문제로 삼은 것이다. 연구위원회는 김춘배의 성경해석이 '오류'라고 보고했다. 그 보고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확정하고 성경을 근거로(창 3:16 등) "여자에게 교권을 허락할 수 없다"고 최종 판정을 내렸다. 이리해서 장로교 총회(제 24회)는 약 3년 동안 끌어온 여성 치리권청원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매듭지었다. 이로써, 교회여성들은 장로교회 안에서 해묵은 가부장적 봉건주의 관습이 아직도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을 실감하였다.
 
정리하면, 일제 식민지배시대에는 기독교(개신교) 여성들의 신앙 노선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교회 밖 사회에서는 기독교 여성들이 단체를 조직하여 여성 계몽운동에 적극 나섰고 또 민족의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교회여성 대다수가 봉건주의 관습인 가부장적 질서로 회귀한 교회현실에 순응하였다.
 
3) 교회여성의 몸에 나타난 예수의 생명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현실 안에서 '소수(小數)'의 교회 여성들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교회를 지켜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를 끝까지 몸으로 저항하고 거부하면서 교회를 지켜냈던 것이다. 한국 장로교 총회는 일제의 집요한 신사참배강요를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하고 1938년에 신사참배를 결의했다(제27회 총회).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는 총회의 신사참배결의에 순복하지 않고 여전도회의 총회소집을 미루며 공식 입장을 내어 놓지 않았다. 1940년 경상남도 여전도회연합회가 부산 항서교회에서 회의를 개최했을 때, 이 자리에서 회장 최덕지의 사회로 신사참배에 불참할 것을 선언했다. 이미 신사참배를 결의한 장로교에 속한 여전도회가 공식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여전도회가 총회의 결의를 거부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1943년 한국 장로교가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칭된 이후, 여전도회연합회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지하로 숨어버렸다"(이효재). 이렇게 장로교 교회여성들은 예수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남은 자"가 되어 교회의 신앙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4. 1945년 8·15해방 이후, 생명의 새 싹을 틔운 교회여성들
 
1) 해방정국
 
1945년 8월 15일에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맞이했다. 8ㆍ15해방은 기독교인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안겨준 감격의 날이었다. 한 달 전인 7월에 한국 개신교 교파들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폐합되었으므로, 한국의 장로교는 사실상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제의 패전(敗戰)으로 말미암은 8ㆍ15해방과 더불어 한국 교회가 복구되고 재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앞에서 방금 언급했던 소수의 교회여성들이(소수의 남성 교인들도) '남은 자'로서 교회를 지켜낸 덕택에 한국 교회가 다시 재건될 수 있었다.
 
2)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재건
 
북한에서는 장로교 '5도연합노회'가 결성되었다, 또 남한에서는 8.15해방 직후 서울에서 '남부대회'의 이름으로 교단대회가 소집되었다. 1946년 6월에 열린 장로교 총회(소위 '남부총회')가 교회를 재건하는 총회로 모였다. 같은 시기에(1946년 6월) -장로교 교단의 남부총회처럼- 여전도회전국연합회도 제14회 여전도회 대회를 개최하였다(회장 신애균, 총무 김성무). 이로써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일제 강점기에 한시적으로 지하로 숨어 있다가 지상으로 올라왔고, 또 전국의 지방연합회도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1950-53)으로 말미암아 1951년과 그 이듬해에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총회를 개최하지 못했다. 여전도회의 재정형편도 매우 어려워서 상임 총무의 인건비조차 막연했는데, 회장 김필례의 노력으로 미국 장로교 북장로회의 재정지원을 얻게 되었다. 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운영이 여러 모로 힘겨웠다. 그러나 이때일수록 여전도회는 '월례회인도책'을 발간하여 전국 교회의 여전도회가 정기적으로 모이도록 했고, 또 1956년에 전국연합회의 '회가(會歌)'를 제작하여 회원들이 단결력을 집중시켰고, 그리고 여전도회의 지방연합회를 배가시켜서 13개에서 26개로 늘어나게 했다.
 
3) 여성 고등교육기관(여자대학교) 설립
 
전쟁직후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시절인데도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다음 세대 교회여성 지도자 양육을 위해 여성고등교육기관인 여자대학교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제42회)는 총회 산하에 여자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학교의 정관을 통과시켰는데, 한 해 전에 학교의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여자대학의 설립은 한국 장로교회의 숙원사업이었다.
 
장로교 총회가 설립한 기독교여자대학교의 법인은 1958년 7월에 재단법인 정의학원(貞義學園)으로 문교부 인가를 받았다. 문교부에 제출한 서울여자대학교의 건학이념의 요지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고 지성 덕성 기술이 겸비된 실천적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학교의 부지로 태릉(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 있는 땅을 분양 받았다. 이 땅에 본관을 신축하고, 문교부로부터 '서울여자대학'이란 이름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1961년 4월 15일에 개교하였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이 대학에 이사를 파송하고 물심양면 지원하고 있다.
 
4) 기독교여성의 사회정치 참여
 
또 다른 한 편, 교회 밖 사회에서 기독교 여성들이 활발하게 새로운 국가건설과 사회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1946년에 미군정이 과도정부의 입법의원을 구성했을 때, 45명의 의원 속에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이(신의경, 박승호 황신덕, 박현숙 등) 포함되었다. 이 위원회 구성에 자극을 받은 여성단체들이 남녀평등을 보장하는 입법 건의안을 제출했다. 이 건의안은 민주헌법이 보장하는 기본평등권 뿐만이 아니라 결혼, 가족 및 노동분야를 포함한 총괄적인 민주적 입법을 촉구했다. 또한 여성들이 축첩을 금지시키는 일부일처(一夫一妻)제를 요구하는 여권옹호연맹을 조직하여 '축첩자 입각(入閣) 반대성명서'를 발표했다. 여성들의 이러한 활동이 영향력을 주어서,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대한민국헌법에는 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남녀평등권이 헌법상 보장되었다.
 
5. 1970년대 이후, 모성(母性)의 생명사랑으로 교회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한 교회 여성
 
1) 산업화와 그 이후
 
1960년대 초반부터 한국의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향후 약 30년 동안 한국 개신교는 세계 기독교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때의 교회 성장이란 대체로 대도시 교회의 교인증가와 재정확대였다. 교회 성장은 주로 대중 집회의 전도대회를 통해 일어났다. 그러나 소수의 목회자들은 산업화 사회의 구조문제를 직시하고 “작은 교회”를 지향하며 교회갱신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산업화 시대의 성장에서 소외된 도시 빈민과 노동자를 돌보고 보살폈다. 장로교(예장통합) 총회(제 56회, 1971년)는 기존의 산업전도에서 도시산업선교로 방향을 전환했다. 또한, 농어촌 지역의 교회도 나날이 쇠퇴하였는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전국 인구의 도시 집중에 따른 농어촌 인구의 감소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개신교의 깨어있는 소수가 사회의 민주화열망에 동참하였다. 1980년대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민족 통일운동에 불을 지폈고, 이어서 1990년대에 한국 개신교는 분단된 민족의 화해를 위해 북한선교운동을 전개하면서 한반도 통일을 소망하였다.
 
2) 모성을 기반으로 한 생명사랑운동
 
이 시기에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모성'(母性)을 기반으로 한 '생명사랑'운동으로 한국 교회와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이연옥의 리더십이 수 십 년 동안 크게 기여했다. 그의 리더십은 생명사랑의 부드러운 열정, 섬김을 통한 영향력, 변화를 일으키는 설득력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모성과 모성애는 하나님께서 여성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사"라고 강조했다. 또한 "모성애에서 창출되는 생명 문화는 인간을 양육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에서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는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것"이라 보았다. 따뜻한 모성애가 빚어내는 평화를 창조해 나가는 여성은 생명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면서 자신의 생명마저 포기하기까지 희생하지만, 선을 위해 악을 미워하는 강한 존재이다. 따라서 모성애 문화는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세상의 타락현실에 맞서고, 또한 물질을 숭배하며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다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생명까지 저버리는 몹쓸 현실과 맞선다. 이연옥은 이러한 현실을 구원해내는 모성애 문화가 가정ㆍ교회ㆍ사회에서 형성되고 확산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모성애 여성은 "현명하여 지혜로 충만한 여성"이다. 현명함이란 명철하고 바른 판단력을 가져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를 뜻한다(시 119:100-103). 현명한 여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특별히 교회 여성이 추구하는 현명함은 어떤 경우에도 “여성의 아름다움(美)”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를 갖고 직업 활동을 하는 여성들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고- 여성 본성의 "부드러움과 귀여움"을 잘 간직해야 할 것이다. 모성감각을 잘 간직한 여성은 가정에서 좋은 아내이자 현명한 어머니로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가꾸고 또 직장과 사회에서도 자기의 능력개발하며 키우는 여성이다. 이를 위하여 또 이를 통하여, 교회 여성지도자 이연옥과 여러 여성 동지(同志)들은 모성적 생명사랑의 정신을 교회 여성에게 불어넣는 교육기관인 '계속교육원'을 설치했고(1983년), 교회 여성의 생명의식과 생명력을 결집시키는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관'을 건축했고(1986년), 그리고 교회 내 민주화를 이룬 '여성안수'(1994년)를 실현시켰다.
 
6. 오늘과 내일의 교회여성, 모성적 생명력으로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
 
1) 문명의 전환 : 죽임의 문명에서 생명사랑의 여성적 문명으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삶을 지배해오던 문명이 쇠퇴해가고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조짐이 보인다고 한다. 즉, 20세기 내내 지배하던 '철기문명'이 이제 그 수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철기문명은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남성적 문명'을 대변한다. 굵은 철근으로 집을 높이 짓고, 강한 쇠붙이에 인간의 의지를 새겨 넣어서 이것으로 기계를 만들고( 자동차와 비행기), 그러면서 이 문명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를 외치면서 발전해 왔고(Hans Kueng), 이 철기문명으로 만든 총과 대포와 핵무기로 무장한 힘센 나라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고, 최근에 이 철기문명은 자연까지 정복해 왔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이렇게 힘이 센 철기 문명이 이제 그 수명을 다 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쇠붙이는 강하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산화하여 녹이 슬듯이, 철기문명도 그렇게 수명을 다해 간다고 한다. 쇠붙이의 결정적인 약점은 쇠붙이 자체 속에서 생명이 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명이 결핍된' 철기문명은 이제는 더 이상 미래를 밝혀주지 못한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위기는 철기문명의 위기를 말해주는 하나의 실례이다. 철기문명의 한계점과 그 폐해를 충분히 본 사람들은 새로운 문명을 찾아 기다리고 있다. 산업화 시대 물질 성장 중심의 문명이 아니라 인류와 모든 피조물을 살리는 생명의 문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 생명의 문명은 곧 여성성이 드러나는 부드러운 문명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여성의 리더십은 시대적 요청이라 파악된다.
 
2) 남성적 진리체계로부터 여성적 진리체계로 패러다임 이동: 하이덱거(Heidegger)의 견해
 
오늘날 환경오염과 생태계 위기의 현실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징조의 하나라고 조심스레 말할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서 "여성적 진리 곧 진리는 여성적이라"는 하이덱거의 주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상욱의 연구에 따르면, 하이덱거는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존재에 대한 사유의 '시원'(Anfang)이 형이상학의 '시초'(Beginn)보다 앞선다고 보았다. 이 '시원'이 구약성경 창세기의 '태초'를 뜻하지는 않는데, 서양 형이상학에 의해 망각되기 이전의 세계를 시원이라고 이해했다.
 
하이덱거는 이제 "어머니라는 여성"의 모습(이미지)을 통해 존재의 시원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가능한지 말하려 하면서 그 사유자체가 여성적인 특징을 띈다고 보았다. 오늘날 고도로 발전된 기술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시대에, 화학자들이 생명의 실체를 임의로 분해하고 합성하고 변형시키는 일은 -하이덱거의 견해로는- 존재의 망각에서 비롯되었다. 기술발전에 대한 맹신적 추종은 그 기술이 가져올 위험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한 것인데, 그 위험성은 기술의 발전이 어느 단계 이상으로 이르면 그 기술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상실하는 결과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에 대한 사유를 가르치는 자를 하이덱거는 '어머니'라고 보았다. 그 까닭은 어머니가 모든 인류의 '고향'이자 '사유의 고향(근원)'이기 때문이다. 이에, 가르침의 본질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기꺼이 스스로 (어머니 가르침에) 순종하도록 하는데 있다. 어머니는 아이가 자기 스스로 원해서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가 어머니의 말을 스스로 듣게 되는 이유는 "어머니의 존재를 고향적인 것과 비고향적인 것의 관계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강제로 훈계하지 않고 아이 스스로 어머니의 말을 경청하여 따르게 한다. 즉, "아이가 자기 스스로에게 성실히 머물게 한다"(sich selbst treu zu bleiben). 그러면서 아이는 고향과 시원을 기다리게 되고, 이 기다림은 개방된 열린 영역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 기다림의 방식을 아이 스스로가 잘 알지 못하므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둠(Gelassenheit)으로써 어느 순간(카이로스) 어머니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그 음성을 듣는데, 그 음성은 이미 (시원에) 있었던 존재를 회상하게 하는데, 그 존재가 지금 미래를 향한 사건으로 도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3) 모성적 생명력이 이끄는 여성리더십
 
방금 앞에서 서술한 대로 20세기 남성적 '영웅리더십'이 퇴조하면서 여성성이 크게 드러나는 '생명리더십'이 요청되는 이 시대에, 한국 장로교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를 40년 이상 이끌어온 이연옥의 '동행리더십'이 오늘날 요청되는 리더십이라 상정하며 이제부터 풀어보고자 한다. 그의 리더십은 여전도회와 한국 기독교에서 공감ㆍ배려ㆍ설득ㆍ기다림의 모성(母性)으로 드러났다. 그가 지향한 이상은 높았고 그곳에 도달해야 할 목표는 저만치 앞에 있는데 주어진 현실 여건이 대단히 어려웠던 까닭에, 그 현실을 하나하나 지혜롭게 극복하면서 이상을 향해 다가가야 했으므로,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에 할 수 있는 만큼 '반걸음만' 앞으로 나아가고 '반발자국만' 걸음을 떼자고 교회여성들을 설득하며 그들과 동행했다.
 
(1) 생명사랑의 부드러운 열정
 
이연옥에 따르면, 모성에서 우러나오는 모성애가 여성리더십의 원리이다. 모성애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모성(어머니 마음)에 반영되어 모성애(어머니 사랑)로 드러났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성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선포되고 성취되었는데,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고 희생하기까지 생명을 존중하는 모성애이다. 이 사랑은 구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화평케 하는 넉넉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또한 모성애에서 표출되는 모성감각이 섬세한 마음으로 서로서로 배려하는 여남평등의 수평적인 교회로 바꾸고 또 '따뜻한 화평'의 사회를 이루는데 헌신할 것이다.
 
생명사랑이 빚어내는 생명운동은 '부드러운 정서'로 드러나고 전개된다. 부드러움은, 남성에게서는 좀 체 찾아보기 힘든, 여성의 속성이다. 여성은 여성 특유의 유순함과 온유함으로 사람을 배려하고 돌보는데, 이를 통하여 여성은 사람을 품어내는 포용력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여성 특유의 리더십인데,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부드러운 리더십이다. 그런데, 부드러운 리더십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드러운 리더십에는 뜨거운 열정이 그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와 받쳐 주어야만, 지도자의 리더십이 아주 어려운 난관에 부딪칠지라도, 강철 같은 인내의 힘을 받아서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2) 섬김을 통한 영향력
 
하나님이 어느 시대에나 리더(지도자)에게 리더십을 '섬김'의 리더십이 확실하다. 섬기는 종이 되려는 자아를 가리켜서 이연옥은 "자기애(自己愛)"를 가진 자아라고 표현했다. 자기애(自己愛)가 있어야만 "인간애"(人間愛, 인간사랑^타인사랑)도 가능하다. 섬김의 리더십은 '관계성'에 기초해 있다고 보았다(막 10:45).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바른 관계가 정립되어 거듭난 자아(自我)가 가장 먼저이고, 그 다음에 사람과 사람이 바른 관계를 맺고, 이에 따른 사람의 자존감 성립 위에서 섬김의 리더십이 시작된다. 섬김의 리더십은 곧 '관계의 리더십'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섬김(diakonia)과 교제(koinonia)가 마치 한 몸처럼 붙어 있다는 뜻이다. 섬김의 리더십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내가 남들 앞에 나서서 호령하기 보다는 내 앞에 다른 사람을 세운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훈련을 쌓으며, '나를 따르라!'는 큰 소리 외침을 자제하고 말을 아끼는 가운데서 주위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다.
 
(3) 변화를 이끌어내는 설득력
 
리더는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 설득력은 섬김의 리더십에서 발휘되는 영향력과 연결되어 있다. 영향력있는 리더의 우선적 과제는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다. 내 생각을 주입하고 내 의견을 강요하며 강제로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설득의 첫 단계이다. 그 다음, 오래 참으며 그들을 이해하는 가운데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설득의 두 번째 단계이다. 설득의 리더십에는 앞으로 닥아 올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가 요청되고 또한 동시에 지나간 과거역사에서 얻는 지혜도 요청된다. 지나온 역사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능력이 리더에게 요청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리더의 자격에 속한다. 리더는 이 두 가지 통찰력(미래 비전과 역사의식)을 함께 가져야 한다. 역사는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나침반이고 또한 역사는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 여성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미래에 대한 묵시 (비전)와 예언자적 영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리더는 미래를 앞당겨 볼 줄 아는 통찰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통찰력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마음의 눈으로(영적 안목) 볼 수 있는 식별력이다. 통찰력이 있어야만 리더 자신이 계시로 받은 꿈과 비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거기로 함께 가자고 설득할 수 있다.

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ㆍ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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