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전쟁

[ 문단열의 축복의 발견 ] 축복의발견

문단열
2013년 09월 04일(수) 15: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I grieve for you, Jonathan my brother; you were very dear to me. Your love for me was wonderful, more wonderful than that of women.
 
진화생물학자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매순간 목숨을 건 경쟁을 하며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한 사람의 뇌세포끼리도 서로 죽이고 살아 남으려는 경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생명체는 점점 더 강해져 진화를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으면서도 세상만사를 오로지 '경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해석하는 반쪽짜리 진실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은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전당(싸움터)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요.
 
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저는 지금은 없어져버린 아련한 추억의 장면들 중 가장 그리운 것이 바로 오손도손 같이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기타를 잘 치는 녀석이 기타를 퉁기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노래 잘 하는 친구가 노래를 시작하고 그러면 다 한 마음이 되어서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곳에는 남들 노래할 때 다음 노래 찾는 사람도 없었고, 성질이 급해서 간주를 점프해 버리는 친구도 없었고, 서로의 노래 실력을 비교해 점수를 매기는 일은 더 더욱 없었습니다. 잘 하는 녀석에게는 모두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치하가 따랐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노래를 못한다고 기분나빠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죠. 그러니까 잘하면 잘 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부르고 듣고 즐거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행복한 기타도, 아름다운 목소리도 모두 다 '스펙'이 되어 우리의 낭만 리스트에서 빠져나간지 오래 되었습니다.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그만이었던 많은 취미들은 이제 '잘하면 질시받고 못하면 무시받는' 숨막히는 경쟁도구가 된 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일체감'을 느끼며 행복해 하라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예술과 유머의 영역까지도 '이기적 유전자'의 경쟁의 장으로 끌어들여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불행하게 하고 있지 않은지요. 오늘 다윗은 사울왕과 함께 전사한 왕자 요나단의 죽음을 통곡으로 슬퍼합니다. 요나단이 어떤 사람입니까.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왕의 첫째 왕자입니다. 사울이 죽으면 다윗은 그에게 둘도 없는 왕위계승의 라이벌이 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요나단만은 다윗에게 친구이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존재자체가 라이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에게는 '이기적 유전자'의 활동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아니, 남녀의 사랑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자신을 버리고 서로를 지켰습니다. 요나단의 제보로 다윗이 목숨을 구한 일도 셀 수 없이 많았고 다윗 또한 요나단이 죽고 나서도 그와 그의 일족에게 죽을 때까지 보호와 사랑을 다 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친구를 잃은 슬픔에 절규하는 다윗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친구조차도 모두 경쟁자로만 느끼는 우리. 태생적 라이벌마저 영원한 친구로 삼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그들의 우정 고백 속에서 눈물이 치미는 것을 느낍니다.
 
정말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경쟁은 하나님이 주신 '게임'의 일부일 뿐입니다. 저녁이 되어 엄마가 불러서 밥 먹으러 가야 할 때는 우리 모두 하던 게임을 내려 놓고 오손도손 가야 합니다. 경쟁은 재미 있을 만큼만 합시다. 목숨걸고 해야 할 것은 '이기적 유전자'의 경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문단열 / 성신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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