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공동체

[ 논설위원 칼럼 ] 논설위원칼럼

조용훈 목사
2013년 08월 20일(화) 15:12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의아해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잘 사는데 왜 다들 불행하다 생각하며 사는가'라는 것이다. 정말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꿈의 국가(코리안 드림)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높지 않다. 아니 거꾸로 우울증 환자나 자살자가 늘고 폭력은 빈발하고 있다. 불행하다는 생각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할 때 우울증과 자살로 나가고, 다른 사람에게로 향할 때 묻지마 폭력이 된다.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다.

기쁨이 고갈된 우리 사회에 다시 기쁜 소식(복음)이 들려야 한다. 130여 년 전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이 땅에 들릴 때 사망의 그늘, 불행의 그림자 속에 살던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 춤을 추지 않았던가. 지금도 우리는 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있다. 우리가 기쁜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며 살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혹시 우리는 기쁨을 재미나 쾌락과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고 순간의 짜릿함을 주는 일에 몰두하는 지도 모른다. 교회보다 백화점이나 대형쇼핑센터를 더 자주 찾는 이유도 기쁨을 소비(소유)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번 그런 기쁨은 이내 사라지고 불쾌감과 더 큰 갈망만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속상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거짓된 기쁨에 매달리는 이유는 어쩌면 참된 기쁨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기쁨 대신에 기쁨의 대용품이라 할 수 있는 재미와 쾌락, 그리고 소유를 갈망하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참된 기쁨이란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외적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물적 소유가 아니라 인격적 관계의 결과다. 하박국의 고백이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합 3:17-18)

참된 기쁨은 내가 쟁취하는 성과물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은 선물이다.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것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서프라이즈일 때 기쁨은 배가된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서프라이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교회는 기쁨을 본질로 하는 신앙공동체다. 기독교인은 감옥은 물론 장례식장에서조차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의 원형이랄 수 있는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여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의 공동체였다. 오늘 한국교회는 우울증과 폭력이 난무한 우리사회에 기쁨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가 금새 공허해질 재미와 쾌락이나 제공하는 오락장이 되어선 안 된다. 더 큰 욕망만 불러일으킬 물질적 소유나 세상적 성공을 파는 시장터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교회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기쁨을 전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살아내는 기쁨의 공동체여야 한다.

조용훈 목사 / 한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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