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현실에 대한 용기-하나의 파라프레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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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 목사
2013년 08월 09일(금) 13:30
설국열차(봉준호, SF/액션/드라마, 15세, 2013)
 
하나님은 세계의 시작을 여셨다. 만물의 모든 시작은 하나님에게서 비롯한다. 삶의 모든 계기는 하나님의 뜻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삶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것들을 자신의 뜻과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며 재구성하면서 죄에 빠진다.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데,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종말을 예고하셨다. 인간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생존의 욕구는 더욱 강해지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책을 강구한다.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고, 새로운 세계가 건설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우선적인 가치로 여긴다.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나 생명이 계속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이 세운 대책이 주는 유익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빠른 재건을 위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펼치며, 가난한 자와 약자의 존재감과 가치는 명분상 강조할 뿐, 사실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할 뿐이다. 결국 가난한 자와 약자는 강자와 가진 자를 위한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 체제 유지를 위해 현실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각종 이념이 고안되고, 권력은 감시와 처벌의 방식을 통해 행사된다. 신분은 대물림되어 이동과 상승이 불가능해진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면하는 현실을 유일한 삶의 가능성으로 여긴다. 이것을 간파했던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 사실에 이의를 제기한다. 마치 동굴 입구에 등을 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림자를 실재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나 동굴 밖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빛의 존재를 말할 뿐만 아니라 동굴이 유일한 세계가 아님을 주장하고 또 계속 설득한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지성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또한 동굴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의지의 전환과 노력이 필요하다. 진실을 알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돌이켜 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동안 체제를 지지해주던 이론에 순응하지 않으면,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위험을 예고하면서 혹은 동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체제 전복자로 간주하면서 제거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현실에 매여 사는 이유는 단지 현실이 주는 안락함 때문만은 아니다. 불만으로 가득하다 해도 현실과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혹시 누군가가 말을 해주어도 이미 학습된 불가능성 때문에 처음부터 좌절하거나 혹은 현실을 지배하는 각종 이론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수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지의 180도 전환이 힘든 까닭이다.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죽음에 해당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은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기 위해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뿐 아니라 실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성의 사용을 주장한다.
 
동굴에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해 플라톤이 이성의 가치와 사용을 역설했다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의 존재가 있음을 믿고,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히11:1)
 
그러나 신앙을 갖고 사는 삶이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뚫고 나가야 할 역경이 있는가 하면, 현실을 어둡게 하고 또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많고, 유혹하는 것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우리가 왜 또 무엇을 위해 사는지 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일들이 많다. 정체성에 큰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표에 이르기도 전에 숨을 거두기도 한다. 감각적인 현실을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신앙이 추구하는 또 다른 현실을 망각하며 살기도 하고, 때로는 알고 있기는 해도 그곳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여 절망하거나 용기를 내어 감행한다 해도 중도에 포기한다.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까"라는 사도 바울의 탄식은 바로 이런 환경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육신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현실을 추구하는 영혼이 탄식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현실과는 다른 세계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세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걸까?
 
사도 바울은 탄식하며 묻는 가운데 스스로 대답을 주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약속에 따라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시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현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자신이 비록 두 개의 법 사이에 끼어 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주신 구원의 약속을 받고 있음을 믿고 고백하며 감사한 것이다. 이 고백은 한편으로는 종말론적인 성취를 기대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머물며 살면서 또 다른 현실을 간헐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하며 살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현실을 보는 신앙의 안목이며, 또한 언제라도 현실을 넘어 하나님의 현실로 넘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그 가능성은 알에서 깨어나는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며,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세계를 파괴하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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