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말은 상황을 변화시킨다

[ 홀리스피치 ] 홀리스피치

신은경
2013년 08월 07일(수) 13:18

실상 그런 뜻도 아닌데 강조하느라 혹은 과장하느라 다소 지나친 말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흔한 예로 '죽겠다'와 '미치겠다'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원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우리 말 습관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보고싶어 죽겠다. 더워 죽겠다, 힘들어 미치겠다. 장사가 안 돼 미치겠다' 등. 심지어 좋은 문맥 가운데에서도 이 말이 등장합니다. '너무 좋아 죽겠다. 맛있어 죽겠다. 게임이 너무 재밌어 미치겠다' 좋으면 좋았지, 너무 좋을 건 뭐 있으며 미칠 것까지야 없지 않을까요?
 
장성한 아들이 신붓감을 데려왔는데 부모님 마음에 흡족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완강한 반대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허락 못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이렇게 반대를 하면 더 간절해 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표현으로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한 친구나 자식에게도 너무 실망한 나머지 "네가 성공을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심한 말을 듣고 이 기회에 분발하여 정신을 차리길 바래서 하는 말이지만 반어법치고는 너무 심합니다.
 
게리 채프먼의 책 '십대를 위한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에 보면 사람마다 자기가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언어가 각기 다르다고 합니다. 그 다섯 가지는 긍정의 언어, 신체적인 접촉, 진지한 대화시간, 봉사의 행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물입니다. 어떤 청소년은 선물을 받았을 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만, 어떤 자녀는 부모가 긍정의 언어를 사용해 주었을 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런 타입의 청소년은 부모님의 말 한마디에 큰 격려를 받거나 상처를 받게 됩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잔인하고 매몰찬 부모님의 비난은 재앙에 가깝습니다. 그에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기(잠 18:21)"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아는 한 분은 정말 욕을 하고 싶을 때에도 "에잇, 이 부자가 될 놈아!"라고 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긍정의 언어가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셔야 모든 것이 가능함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긍정, 진정한 성공의 비밀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1) I can do everything (2)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세상 사람들은 (1)만 외칩니다. 그래서 더러는 성공하고 많은 사람은 그러고도 좌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2)까지 외칩니다. 긍정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성공이란 어떤 모습인지 그 비밀을 알고 외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긍정적 고백이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은경 / 장충단교회 권사ㆍ차의과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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