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15~2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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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7월 11일(목) 15:50

월-선택
본문: 야고보서 1:5-8
찬송가: 204장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살다보면 이 기도문을 절실하게 외우게 되는 때가 있다. 삶이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인데 정말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때, 그런 때 이 기도문은 절실해진다. 내 앞에 주어진 삶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때, 이 기도문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런 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절실하게 구하게 된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전한다. 하나님은 풍요로운 지혜를 지니고 계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어하시며, 게다가 지혜가 부족한 우리를 전혀 나무라실 생각이 없으시단다. 그러니 우리는 그 지혜를 구하기만 하면 받을 거란다.
 
얼마나 단순하고 또 아름다운가.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참 어렵다. 대부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산다. 그렇게 해놓고는 어려운 상황이 되면 하나님께 왜 나를 이 지경이 되게 했느냐고 앙탈이다.
 
지금부터라도 하나 하나의 선택을 할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소한 일 하나도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는 것이다. "하나님, 오늘 제가 만나는 고객의 민원 처리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나님, 오늘 저녁 메뉴로는 뭐가 좋을까요?" 답을 얻는 것보다 묻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왜냐면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누가 우리 삶의 주인이며 지혜의 원천인지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 아무 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말란다. 아마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대부분 이놈의 의심 때문일 것 같다.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듯 믿음의 근원도 하나님이시다. 의심이 일어날 때마다 그냥 조용히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은 믿음을 선물로 돌려주신다.
 
지혜가 부족한가? 아낌없이 주시며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자.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지혜가 요청될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보자. 그러면 절실하게 요청되는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답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 하루도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나 하나 선택할 때 당신의 지혜를 제게 주셔서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지성 목사 / 새터교회


화-기억하신바 된 신앙
본문: 사도행전 10:1~8
찬송가:394장
 
본문에 이방인이면서 백부장인 고넬료가 나온다. 그럼에도 그는 모범적인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의 신앙을 잘 표현해주는 말씀이 4절에 나온다. 그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라는 표현이다. 비록 고넬료가 이방인이었지만 이처럼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된 신앙의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고넬료는 경건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로마시대는 모든 면에서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고넬료의 경건은 온 집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었다. 이것은 그의 하인들이 증거할 정도로 진실된 것이었다. 혼자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귀하지만 온 가족이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더욱 귀하다. 또한 고넬료의 경건은 구제를 많이 하는 삶이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구제 기관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면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표출된다. 또한 고넬료의 경건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삶이었다. 기도는 성도들의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둘째, 고넬료는 믿음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기도로 깨어있지 않았다면 환상을 통하여 주시더라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고넬료는 밝히 보고 그대로 실행하였던 것으로 보아 깊은 은혜를 체험했던 사람이었다.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순종의 사람이었다. 고넬료는 환상을 보고 종들을 욥바로 보냈다. 고넬료의 마음은 100% 순종할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신다. 은혜를 주신다.
 
넷째, 25절과 33절에서 고넬료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25절에서 베드로를 청해서 그가 왔을 때 인간 베드로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분으로 알고 엎드려 절하고 받아들였다. 33절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한 준비된 마음으로 다 하나님 앞에 왔나이다'하는 겸손한 신앙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겸손한 자가 은혜를 받는다.
 
이러한 고넬료의 믿음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말씀을 듣는 순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축복을 받았다.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고넬료처럼 우리도 경건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된 고넬료의 믿음이다. 신앙의 축복은 물과 같이 위로부터 아래로 흐른다.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닫고 실천하며 순종하는 겸손한 신앙의 삶으로 나아가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혼탁하고 어지러운 이 시대에 경건한 믿음의 삶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엄대용 목사 / 새능교회


수-네 은과 포도주는? 
본문: 이사야 1:21~31
찬송가: 420장
 
이 시는 애가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성읍의 영적, 도덕적 타락과 쇠퇴 때문이었다. 고아들과 과부들은 무시되었고, 공의와 의로움의 상징이었던 성읍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졌다. 은처럼 정결했던 나라가 불순물처럼 되었고, 포도주처럼 맛있던 나라는 맛없는 포도주처럼 되었다.
 
21절을 보면 원래 그 성읍은 신실했고, 정의와 공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21절에서 이제는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고, 정의와 공의가 충만하던 도시가 살인자들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깊이 탄식하고 있다. 
 
"살인자들뿐이로다"는 말은 그들이 모두 살인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것 같다. 어린이 성폭행 살인범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이는 하나님께서 깊이 탄식하실 일이다.
 
22절에서는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라고 한다. 네가 만들어내는 은에는 불순물이 가득하고 네가 만든 포도주에는 물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은은 순수해야한다. 불순물이 섞이면 광택이 죽는다.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맛이 죽는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런 은과 포도주 같다는 것이다.
 
당시 은은 보배의 대명사이고, 포도주는 기쁨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은에는 불순물이 가득하고, 포도주는 물로 희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들어 내는 삶이 불순물 투성이며 퇴색되어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이 보배롭지 못하고, 기쁨이 상실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23절에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고 한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그 나라의 지도자에 달려 있다. 지도자들이 정의와 공의를 지켜야한다. 그들이 도둑과 짝하고 뇌물을 구하면 나라가 혼탁해진다.
 
24~26절에서 타락한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전능자께서 개입하셔서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시고, 29~31절에서는 산당제사의 종식을 선언하신다. 당시 유다인들은 그늘진 상수리나무 아래나 동산에서 우상을 섬겼다. 그들은 상수리나무나 동산이 자기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마른 상수리나무와 마른 동산 같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신을 살펴 광택과 맛을 늘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나로 하여금 세상의 것으로 혼합된 신앙을 갖지 않게 하시며, 물 섞인 포도주처럼 흐린 믿음을 갖지 않도록 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동 목사 / 의선교회


목-감사의 생활
본문: 살전 5:16-18
찬송: 295장
 
우리 인간 생활에 두 가지 삶의 기본적인 모습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 중에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삶이다.
 
감사가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요, 감사가 없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다.
 
그럼 우리가 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까?
 
먼저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하며,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하며, 우리들에게 천국을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이러한 영적인 감사외에도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속에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많다. 성도들의 생활은 감사로 출발하여 감사로 마무리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면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본문 18절을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감사는 향기로운 제물이요,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값있게 쓰는 제사이며 하늘의 언어요 성도들의 복받는 비결이다.
 
성경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다. 왜냐하면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은혜와 복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표시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 그 기쁨 그 사랑을 통하여 약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는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할 때 받을 복은 무엇일까?
 
먼저 마음으로 감사할 때 마음의 기쁨과 평안과 복을 받는다(엡 5:19). 그리고 몸을 드려 감사할 때 강건의 복을 받는다(롬 12:1~2). 또한 물질을 구별하여 드림으로 감사할 때 물질의 복을 받는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탄식했다. 이 말씀의 뜻은 동물도 주인을 알건마는 이성을 가진 인간들이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동물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
 
감사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감사는 신앙의 척도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제사요, 영육을 풍성하게 하는 복된 삶의 첩경이요, 평안과 기쁨을 창조하는 근본이다.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임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모든 것을 그 뜻대로 선하게 인도하시며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감사가 넘쳐나는 삶으로 인해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한 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대윤 목사 / 양양교회


금-오른편에 던지라.
본문: 요한복음 21:1-6
찬송가: 338장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보면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심판하러 오신다"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편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하심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 지심을 극구 만류할 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음으로써 오늘 본문에서처럼 실패와 좌절의 연속을 맛보게 되었다. 예수님 우편에 달렸던 한 강도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짐으로써 낙원에 이르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피곤에 지친 인생들, 자기중심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 누구에게도 찾아주신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무력함을 겸손이 고백해야 하며 베드로처럼 "아무것도 없나이다"라며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기다려야한다.
 
'배 오른 편에 던져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삶을 오른편으로 돌리라는 말씀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말한다.
 
왼편은 주님을 떠나는 편이고, 우편은 주님이 함께하는 편이다. 전도서 10:2에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선포하신다. 저들은 주님이 주리실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말씀하실 때 저들은 일심으로 부인 한다. 그러나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정의하신다. 이 말씀이 곧 주님 오른 편이다. 따라서 말씀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고 축복이 있다.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말씀이 없다. 말씀이 없는 곳에는 능력도 없고, 기적도 없다. 오직 저주가 그들 앞에 찾아오며 사라지지 않는 허무와 고통이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말씀을 통해 순종함으로 하늘의 상을 받는 아브라함의 후예가 되자.
 
<오늘의 기도>
주님! 현대의 삶이 무력한 것은 주님 말씀 편에 서지 못한 이유인줄 믿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담대하게 하시는 능력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만규 목사 / 안성교회


토-행복을 누리고 행복을 나누고(2)
본문: 시84:1-6, 요15:11
찬송가: 295장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상한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우리가 행복해지고, 신앙이 행복해지면 나머지 일들은 저절로 채워진다. 행복은 소유나 환경에서 오지 않는다. 행복은 관계에서 온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어야 우리에게 행복이 온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편 기자(記者)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84:2-3) 이 정도면 거의 상사병(相思病) 수준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일을 그리워한다. 하나님과 만나야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양(量)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의 총량(總量)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화평을 이루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들이라 불릴 것이다"(마 5:9 현대인의 성경) 나는 내 주변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는가? 어떻게 해야 화평할 수 있을까? 내가 먼저 행복해지면 서로 화평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행복을 누린다.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나눌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모세의 예(例)를 보자.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40년 동안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다니다가 세상을 떠나기 전 백성들에게 했던 고별설교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광야생활 하면서 얼마나 모세를 힘들게 했는가? 우상숭배하고, 대들고, 흉보고, 헐뜯고. 이런 사람들에게 모세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33:29a) 어떻게 이런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을까? 까닭이 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33:11a) 모세에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행복한 모세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누린 사람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오늘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것을 사람들이 보고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종균 목사 / 성답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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