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8~13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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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7월 02일(화) 14:01

월-행복을 누리고 행복을 나누고(1)
본문: 엡2:1-10, 19
찬송가: 408장
 
우리가 누리고 싶어 하는 행복은 어디서 오는 걸까? 돈인가? 힘인가?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에서 온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복은 완성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신 33:29a)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에게 만물을 주셨다. 만물을 다스리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다. 그래서 행복 동산 에덴에서 쫓겨났다.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우리의 불행을 십자가 위에서 해결해 주셨다.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보배롭고 존귀하게 해주셨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사 43: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서 살까?
 
행복이 조건과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이 가지고 잘 살아야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근본적인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바뀌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지만 지금은 하늘에 호적을 둔 사람이다. 이것을 모르니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요셉을 보자. 그는 노예로 팔려갔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조건과 환경으로만 판단하면 요셉은 불행한 사람이다. 하지만 성경은 요셉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노예로 있을 때나 감옥에 있을 때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요셉이 형통(亨通)했다." 형통했다는 말은 행복했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행복은 삶의 조건과 환경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행복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행복하지 못하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의 신분과 위치도 바뀌었다.(주안道 천국市 행복洞 1번지) 그러면 행복한 거다. 잠시 오는 어려움은 더 잘되기 위한 훈련과 연단일 뿐이다. 요셉을 행복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행복하게 하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 왜 행복하지 못한지 알게 하옵소서. 오늘 살면서 우리의 신분을 바로 알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오늘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행복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종균 목사 / 성답교회


화-참된 믿음의 삶이란?
본문 : 히브리서 11장 1절 - 3절
찬송 : 267장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생활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 믿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특징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오늘 성경을 통해 진정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믿음은 약속으로 사는 삶이다.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선택이란 하나를 포기하고 하나를 취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 땅의 것을 포기하고 영원한 것을 선택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의 현실과 소망 중 어디에 그 가치를 두고 살 것인가에 대해 우리의 이성을 계속적으로 괴롭힌다. 또한 우리가 있다가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살 것을 기대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뢰의 수준이 아닌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가치관을 말한다.
 
여러분의 가치관의 최고봉은 어디이며 누구이며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영원한 세계로의 확실한 약속이 없기 때문에 오늘 가능하면 많은 것을 모아두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마음을 잊기 위해 쾌락을 탐한다. 성경은 그러한 가치관의 미래는 스스로 파멸될 것을 예언한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죽어간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가치관을 갖기를 호소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종교행위 이상의 근본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으로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의 인생을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라고 말한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힘차게 걸어가시기를 기원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약속들이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관이 되게 하시고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오늘 하루를 힘차게 걸어가며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세상의 유혹 속에 우리자신을 지켜 거룩하게 하시고 참된 믿음의 삶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대윤 목사 / 양양교회


수-새벽에 일어난 기적
본문:사도행전 5:17-26
찬송가:496장
 
새벽은 하루의 가장 달콤한 순간이라고 '윌 콕스'는 말했다. 한국의 크리스찬은 한번쯤 새벽의 기도를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1907년 새벽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 속에서 폭발적인 교회 부흥을 이루었던 것이며, 성경에 하나님은 새벽에 우리를 도우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낮이나 밤이나 시간의 흐름은 같은데 항상 새벽은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는 때임을 우리에게 증명하신다. 그러나 피곤한 몸을 일으켜 주님 전에 나온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새벽기도하는 CEO'라는 책은 새벽기도에 좀 약한 이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는 책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12명의 CEO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한결같이 어려운 시절, 하나님을 만났고, 절망 대신 그 분을 만나 기도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12명의 경영자는 모두의 겸손을 말하면서 바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을 때에 문제는 기도의 제목이 되고, 낙망은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기적의 역사는 진정 이른 새벽부터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에서 시작되었다. 더욱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어떤 기술이나 과장된 무용담이 아니라 오직 진실(믿음)이 바닥에 깔려 있을 때라고 말한다.
 
새벽은 온갖 거짓이 다 사라진 수정과 같이 맑은 때이다. 저녁은 세상의 시간이요 마귀가 역사하는 때라고 한다면, 새벽은 육신적으로 힘들지만 반드시 주님이 역사하는 시간이요,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는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립 투사인 도산 안창호 선생도 새벽기도의 사람이었기에 조국을 지극히 사랑할 수 있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의 사도들이 옥에 갇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깊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자, 주의 명령을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칠 때 주님은 대적들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여 또다시 이적의 역사를 나타내 주셨다.
 
새벽의 역사는 성경에 무수하게 나온다. 출애굽 당시 홍해 바다가 갈라진 때도 새벽이요, 광야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내리시던 만나도 새벽에 주셨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새벽의 이적이었다. 특별히 새벽은 우리 주님이 고요히 드리는 기도시간이었다. 주님은 새벽기도를 통해 십자가를 지시는 죄용서함의 최고의 이적을 이루신 것이다. 예수님이 새벽기도의 창시자라면, 길선주 목사님은 새벽기도의 전수자이시다.

<오늘의 기도>
새벽기도를 소홀히 하는 교회는 어떠한 희망과 꿈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어떤 상황이 우리를 위협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몸소 행하신 새벽기도를 본 받아 실천하므로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만규 목사 / 안성교회


목-순서의 문제
본문: 요삼 1:1-6
찬송가: 419장
 
요한 3서는 사도 요한이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과 물질을 기쁘게 바친 신실한 성도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이다. 요한은 이 편지에서 가이오의 선행이 온 교회에 알려져 있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뻐하며 칭찬하고 있다. 성도들은 특별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씀은 잘되는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되는 순서를 말하고 있다. 요한이 볼 때 가이오는  영혼이 잘되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는 것처럼 범사에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랐고, 몸도 강건하기를 간구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이 잘됨 같이 모든 일이 잘 되어야 한다. 영혼의 잘됨 없이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은 복이 아니다. 따라서 잘되는 것이 많은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잘되는 순서이다.
 
요한이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형제들이 와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4절). 진리 안에서 행한다함은 말씀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말씀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 말씀의 통제를 받는 상태를 가리킨다. 운전할 때, 하나님께 안전을 지켜달라는 기도한 사람은 과속하면 안된다. 기도했으면 과속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과속하지 않아야한다. 그것이 말씀의 통제를 받는 사람의 태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과 함께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데 모든 일이 잘될 수 없을뿐더러 잘 되어서도 안된다. 가이오는 믿음의 형제들을 도우며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따뜻하게 대접했다. 가이오의 삶을 통해 볼 때,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영혼이 잘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언젠가 필자에게 낮선 사람이 실례를 했는데 필자가 목사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작업복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교회관리인인줄 알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더 화가 났다. 그가 필자를 관리인으로 알았으면 더 겸손하게 대했어야 했다. 그리스도인은 잘 아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게 대할 것이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잘 모르는 사람과 낮은 사람을 대하는 표정이 어떤지를 보면 그의 믿음과 인격을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의 말을 통해 보면 '건강한 영혼에 건강한 육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요한은 영혼이 잘되는 것처럼 육체가 강건하기를 바랐다. 영혼이 강건하지 못한 사람이 육체만 강건해서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가이오처럼 진리 안에서 행하고 나그네들을 대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동 목사 / 의선교회


금-더할 나위 없는 기쁨
본문: 야고보서 1:2-4
찬송가: 458장
 
더할 나위 없는 기쁨! 말만 들어도 몸 속 깊은 데서 기쁨의 샘이 솟아나는 것 같다. 가슴이 설레이고 눈동자가 커지고 입꼬리도 올라간다. 언제였던가! 내 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껴보았던 때, 그때가 언제였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생애 최고의 기쁨을 추억하려는 필자에게 야고보서 기자는 찬물을 끼얹는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패턴으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낀다. 내가 로또에 당첨이 되면 기쁘고, 사촌이 땅을 사면 화가 난다. 일이 잘 되면 기쁘고, 일이 꼬이면 힘들고 슬프고 화가 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일이 술술 잘 풀릴 때가 아니라, 가는 데마다 축복을 받는 날이 아니라, 시험에 빠질 때, 어려움을 겪을 때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말씀은 나의 습관을, 습관대로 보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회개다. 앤소니 드 멜로는 '회개는 죄를 뉘우치며 슬퍼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그것이 회개다. 머리의 변화, 가슴의 변화다'라고 했다.
 
내가 지금 겪는 어려움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이가 반항하고 집을 나갈 때, 실패했을 때, 통장이 바닥났을 때, 누군가 죽었을 때, 관계가 깨어졌을 때,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계속해서 성서는 말한다. 그 시험과 어려움이 인내를 낳는 줄 알고 있으니 그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라고. 지금 겪는 시련은 좀 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도록 하나님께서 내 삶에 마련해주신,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며 기회라고.
 
종종 우리는 인생의 시험과 시련을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통과한 빛나는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같이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목소리로 그때 그 어려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은 오히려 그 일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자. 새롭게 뜬 눈으로, 새롭게 오늘 하루를 보자. 어렵고 힘든 일이 산적한 오늘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곳곳에 숨어있는 보물찾기 지도처럼 바라보자. 생각만으로도 좋지 아니한가. 얼마나 많은 기쁨이, 그것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오늘 내 삶에 숨어있을 것인가.
 
<오늘의 기도>
주님, 제가 겪는 어려움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 눈과 머리와 가슴을 열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지성 목사 / 새터교회


토-기도하는 가정
본문: 사무엘상 1; 1~20
찬송가: 364장
 
본문에 엘가나라고 하는 한 가정에 한나라고 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한나가 처한 환경은 매우 단조로웠고,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브닌나는 자녀가 있었으나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새로이 풀어 갈 아들을 한나에게 주신 것은 바로 그녀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와 그에 따른 기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윗 왕조를 세우기 위한 첫걸음은 레위 지파 여인의 무자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우리에게 고통의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불행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그 속에 담겨져 있음을 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한나가 어떻게 슬픔을 해결하고 있는가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한다.
 
첫째, 슬픔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서 오는 것이다. 2절을 보면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는데 여기서 한나의 슬픔이 시작된다. 얼마나 그 슬픔이 큰 것이었는지 6절에 한나가 브닌나를 대적으로 보고 있다. 브닌나는 가진 자로서 동정과 위로보다 오히려 한나가 자식이 없다고 괴롭히고 있다. 우리의 슬픔도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온다. 바꿔말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슬픔을 느끼는 것은 나 때문일 수 있다.
 
둘째, 그런 한나는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기도로써 극복하고 있다. 기도하는 성도는 주님의 도움을 받는다. 또한 기도는 가장 건강한 성도의 모습이다.
 
셋째, 그럼 한나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서원하는 기도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한나의 이런 기도를 드릴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셨다고 볼 수 있다. 한나가 아들을 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 기도이다.
 
넷째, 한나의 기도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15절에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나의 깊은 속마음을 펼쳐 보이는 것이 기도이다. 일방통행식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다 보여 드리는 것이다. 기도가 하나님께 보이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대화라면 그 주파수를 정확하게 맞추어 놓고 기도해야 응답을 받는다.
 
다섯째, 기도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20절 말씀에 보면 한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서 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의 서원대로 하나님께 이 아이를 바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믿음과도 같은 것이다.
 
오늘 한나라는 마음이 슬픈 한 나약한 여인의 기도는 후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길러내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기도가 중요한 것이다.
 
<오늘의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날마다 우리가 기도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주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엄대용 목사 / 새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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