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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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 26일(수) 16:41

월-주의 일꾼
본문: 느 12:27-30
찬송가: 347장
 
느헤미야서 전체를 통해 가장 감격적인 장은 단연 12장일 것이다. 12장은 성벽 봉헌의 기쁨으로 넘쳐 흐르고 있다. 백성들은 성벽을 재건하는 동안 수많은 난관을 뚫고 나갔다. 느헤미야는 목숨의 위협도 여러 번 받았다. 믿었던 백성들의 아픔의 절규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어려움이 있었기에 성벽 봉헌은 더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성벽 봉헌은 몇 몇 소수가 아닌 모두의 기쁨이었다. 성벽을 재건하느라 소외된 백성이 없었다. 억울하고 서러운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면서 공사가 진행되었다. 의문이 든다. 무엇이 이들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했는가? 무엇이 대적자들의 방해를 견디게 했단 말인가? 무엇이 목숨을 걸고 역사에 동참하게 했을까? 무엇이 한 사람의 소외도 없이 모두의 기쁨이 되도록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깃발이 펄럭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꿈의 깃발, 하나님의 비전의 깃발, 이 깃발을 보고, 이 깃발을 마음에 품고 이 깃발 아래로 모였기 때문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29:18)." '힘들어도 고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새 역사를 일구어내자는 깃발', '힘을 내어 성벽을 재건해서 나라를 지켜내자는 깃발',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자는 깃발', '힘을 내서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자는 깃발' 이 깃발 아래 너 나 없이 모두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깃발은 갈등을 보지 않는다.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다. 갈등보다 더 감격적이고 더 열정적이게 하는 것이 바로 깃발이다. 깃발이 시련과 고난을 없애 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의 고통보다 더 희열이 넘치게 한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도 이겨내게 한다.
 
이 깃발을 누가 흔들림없이 끝까지 치켜들었을까? 바로 느헤미야이다.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해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순간마다 백성들로 하여금 깃발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꿈을 보게 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이다. 깃발 아래로 모을 줄 알고, 힘들여 주의 일을 섬겨도 그것이 힘든 줄 모르는 자가 바로 주의 일꾼이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 달려 나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신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지도자가 하나님을 향해 있다고 확인되면 따르는 이는 힘을 내어 그 선한 일에 동참하게 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느헤미야와 같은 주의 일꾼으로 헌신하자. 곳곳마다 하나님의 깃발을 들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일꾼이 되자.
 
<오늘의 기도>
능력의 하나님, 낙심하여 넘어져 있는 곳에서 다시 눈을 들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일어서게 하소서. 하나님의 깃발을 펄럭이게 하는 주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기엽 목사 / 충무교회


화-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어느 시인의 고백)
말씀: 아가서 2:10
찬송가: 299장
 
토요일 오후, 전철 안 풍경은 늘 상투적이고 삭막하다. 모두가 똑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손에는 스마트하다는 폰이 쥐어져 있다. 영화 보는 사람, 게임하는 사람 등 다양한 컨텐츠를 즐기고 있다. 각자의 스마트폰에 사로 잡혀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
 
사람과의 관계는 사라져 버리고 기계가 그 자리를 대체한 디지털르네상스시대. 디지털의 맹렬한 공격 속 우리는 터미네이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 사색'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든 구절이 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감방의 여름은 대 여섯 명의 37도에 체온이 모여 죽이고 싶은 증오를 만들어내고, 반대로 겨울은 서로의 온기로 그 혹독한 감옥의 추위를 견뎌낼 수 있게 한다. 한겨울 살을 에는 듯한 현실을 견뎌내는 것은 서로의 몸속으로 전해져 오는 깊고 깊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혹독한 고난을 이기고 인생을 살만하게 만드는 회복의 능력이 탁월하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든이 넘어서까지 고달픈 늙은 육신을 끌고 매일 전도하며 남은 시간은 종이박스를 주워 주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장로님. 쌀독을 교회 현관 한쪽에 두고는 어려운 이웃들 누구든지 가져가라는, 난치병으로 수족이 자유롭지 않아 휠체어 신세를 지며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것이라는 개척교회 목사님. 대학 4학년졸업반, 취업준비도 미루고 학자금 대출 갚느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에도 검정고시 준비하는 10대들에게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 시간을 나누고 재능을 나누는 23살의 한 청년.
 
인간에 대한 진실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형식이 옷을 입고 인스턴트식 사랑이 판을 친다고 한다. 디지털르네상스시대라는데 오히려 소통이 단절되어버렸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소통이 단절된 곳은, 지독히도 외롭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 사랑이 식었다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그렇다면 다시 묻고 싶다. 우리는 교회가 그렇게 되기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청년들이여! 그리스도인들이여!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두려워하지 말자. 자존심 상해하지 말자. 더 많이 사랑하자. 우리 손 안에 들어있는 스마트폰 대신 사람에게로 관심을 돌리자. 사랑이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게 만드셨다. 사랑은 하나님께로 흘러나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적시고 또한 모든 곳으로 흘러 그 사랑의 물길이 닿는 곳을 회복시키시고 살려 내신다. 예수의 신부들이여! 우리 서로 뜨겁게 가슴이 벅차오르게 사랑하자.

<오늘의 기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님은 나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 고백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순희 목사 / 하늘꿈교회


수-10%의 뇌로 사는 박모세
본문: 요21; 19~23
찬송가: 79장
 
얼마전 박모세라는 검색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스타킹'이란 TV프로그램에 출연한 21살 청년으로 후두부 뼈가 없어 뇌가 흘러나와 임신 5개월 때 이미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 출산하지 않기를 권유 받았지만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로 출생, 4차례의 수술을 거쳐 뇌의 90%를 절단해 내고 산 지적장애 청년이었다.
 
태어날 때도 울음소리를 못 내던 아이가 3달이 지나서야 첫 웃음소리를 냈고 5살 때야 말문이 트이고 7살 때부터 노래를 따라 불렀다는 시각장애, 신체장애, 중복장애 1급인 그가 부르는 노래 'you raise me up'은 영혼을 울리는 맑음 그 자체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고 모세는 어느 새 21살 청년이 되어 절대음감을 자랑하며 순수한 사랑 고백까지 하고 있다. 우리는 100%의 정상적인 뇌를 가지고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세상을 흠모하고 사는지…. 박모세 처럼 가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 순수하지 못함에 반성했다.
 
오늘 성경 베드로도 본질을 놓치고 요한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 주님은 거듭 상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뜻일까? 온갖 조롱과 비난을 퍼붓는 시므이를 다윗도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본질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면 시험에 들고 죄에 빠지기 쉽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했던가. 비교하면 마귀가 틈탄다. 최초 가정의 자녀 가인도 동생을 신경쓰다가 안색이 변하고 죄의 문에 엎어졌다. 1달란트 받은 사람도 남의 것과 비교하다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고, 하루 종일 수고한 품꾼은 1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사람을 신경 쓰다가 먼저 된 자 나중 되는 창피를 당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상관하지 말 것을 거듭 언급했다. 더 이상 다른 것에 마음 쏟지 말자. 내게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는 멋진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또 베드로가 요한에 신경 쓰는 것은 호기심을 넘어선 자신감 결여 때문이다. 자신감이 없으니 남을 신경 쓴다.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과 주유소 급유하다 결혼할 뻔 했던 동창을 보고 "저 사람과 결혼했으면 대통령 부인이 아니라 주유소 사모가 되었겠네"라며 놀리자 "아니, 저 친구가 대통령이 돼 있겠지"라며 받아쳤다고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당당한가. 신경 쓰지 말고 남과 비교하지 말고 더욱 당당한 성도가 되시길 바란다. 내게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자.
 
<오늘의 기도>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게 주신 것 소중히 감사하며 자신 있게 제자의 길을 가는 성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종엽 목사 / 함께하는교회


목-예수를 바라보자
본문: 히브리서 12:1-3
찬송가: 88장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사랑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것이며, 희망이 있으면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본문에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이다. 1절의 말씀처럼 구름 같은 증인들을 신뢰하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 마치 경주하는 사람들처럼 인내하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고 살자.
 
첫째, 믿음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주님이시다. 모든 기대와 희망 그리고 나의 꿈을 이루어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정치적 예수도 아니고, 종교적 예수도 아니며, 윤리적 예수 선생도 아니고, 민중 예수도 아닌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주님,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자.
 
둘째,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다.
 
인간의 온전성은 정신과 신체와 인격과 환경이나 타인과의 관계와 직업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차원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도 개의치 아니하셨으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십자가의 고통이나 희생과 부끄러움이 있어도 결국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담대해야 한다.
 
셋째, 생각해야 할 주님이시다.
 
3절에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프랑스의 수학자요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파스칼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하는 힘을 역설하였다. 어떤 생각이든지 그것은 하나의 씨앗이며 그것은 미래에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사무엘 스마일즈는 "생각은 행동을,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성격을, 성격은 운명을 거둘 것이다. 그러므로 큰 생각을 길러라. 생각 이상으로 오르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생각이야말로 위대한 삶의 원동력이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능력과 은혜를 나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믿음의 주님이시며, 온전하게 하시고, 생각의 씨앗으로 풍성한 삶의 결실을 맺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래서 세속주의 물질주의 합리주의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처럼 살자.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들은 믿음의 주님,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 생각의 씨앗으로 풍성한 결실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영욱 목사 / 경주시민교회


금-성령을 따라 행하라
본문: 갈라디아서 5:16
찬송가: 292장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님께서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거스르고 대적하는 세상에서 성령님께 순종하기를 소원한다.
 
오늘날에 성령의 임재와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에 마음에 감동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예배를 드리다가, 설교를 듣다가 ,성경을 읽다가, 기도를 하다가, 큐티를 하다가, 마음에 깨달음이 오고, 감동이 밀려오면 그 때에 그 깨달음과 감동의 마음에 순종해서 그대로 하는 것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손해가 되던, 이익이 되던, 시간이 있든 없든, 성령께서 주신 마음이니까 그 마음 간직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군가 예배를 드리다가 은혜를 받아서 좋은 생각을 품었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이것은 고쳐야 되겠구나.'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이 마음이 바뀌었다. '다음에 하지 뭐.'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말씀은 좋은데 현실적이지 않아. 내 환경이 나아지면 그때에 가서 해도 돼"라며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생각을, 집에 돌아가서는 자기 생각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각은 항상 첫번째 생각이다. 첫 번째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고, 두 번째 생각은 내 생각이고, 세 번째 생각은 마귀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가면 약해지고 변질될 수 있다. 내 생각과 마귀가 준 생각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첫 번째 생각을 따라 행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감동을 통하여 깨달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재한다. 우리는 이 같은 세미한 성령의 임재를 붙잡고 행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해야 할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17절에서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비로소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구원받음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 삶에 열매가 있는지도 중요하다. 생각의 열매보다 믿음의 삶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시대이다. 성령 충만을 받고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로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내 안에 오신 성령님, 충만케 하소서. 성령의 열매로 오늘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길용철 목사 / 숭덕교회


토-의미있는 삶
본문: 마 21:1~11
찬송가: 325장
 
인생을 사는데 있어 소중한 것은 삶의 의미를 아는 겁니다. 인생의 의미를 알고 살 때 인생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이겨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의미를 잃어버릴 때 인생은 방황하며 낙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어 결국에는 무너지는 인생이 되고 만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쓴 빅터 플랭클이라는 의사가 있다. 이 사람은 죽음의 수용소라고 알려진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아우슈비츠는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는 완전한 지옥이다. 그곳에 수용되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서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채 죽어 갔다. 하지만 빅터 플랭클은 자기 인생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의미를 알고 살았다. 그 삶의 의미는 아우슈비츠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자유를 얻어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벳바게라는 동네에 오셨다. 거기에서 두 명의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 묶여 있는 나귀를 끌고 오라 시키신다. 만약 누군가가 왜 나귀를 끌고 가냐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대답하라 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을로 가 나귀 새끼를 끌고 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 등장하는 나귀의 생명의 의미는 주님께 쓰임 받을 때 있다. 나귀가 묶여 있는 상태 그대로 있으면 나귀 입장에서 편할 수는 있지만 의미가 없다. 그 나귀는 주님께 쓰임 받기 위해 존재한 것이다. 또 주님께 쓰임 받을 때 나귀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생명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 인생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 쓰임 받을 때 인생의 의미가 생긴다. 주님께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다. 건강, 물질, 재능, 그 밖의 많은 것들을…. 그런데 그 같은 것을 우리에게 맡기신 이유는 오직 한가지이다.
 
그 이유는 오직 주님의 뜻대로 쓰라고 맡기신 것이다. 내가 가진 물질도 재능도 힘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갈 때 진정 우리 인생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이 된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가치 있는 인생이 된다.
 
우리의 삶이 주님 앞에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축복한다.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주님 앞에 아름답게 쓰임 받아서 우리 인생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 삶의 가치와 의미를 아시는 주님! 우리에게 맡겨진 하루 하루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인생이 되게 하시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려 우리 인생이 주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허태호 목사 / 새희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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