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 문단열의 축복의 발견 ] 축복의발견

문단열
2013년 06월 20일(목) 11:39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 20:17)
And Jonathan had David reafrm his oath out of love for him, because he loved him as he loved himself.
 
이가 아파 치과에 갈 때마다 의사와 간호사가 주고 받는 말이 있습니다. '신경을 치료한다'는 말인데 저는 처음이 이 말뜻을 잘 몰랐습니다. 이 말이 좋은 뜻인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픈이의 '신경을 죽인다'는 뜻인데 그렇게 되면 아픔은 당장 사라지지만 상한 이가 자체적으로 다시 살아날 힘을 상실합니다.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이가 살아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신경을 죽인다'는 말은 곧 그 치아가 생명을 영원히 잃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충치에 시달릴 때마다 왜 의사선생님이 신경을 바로 죽여 날 고통에서 건져주지 않는지 의아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고통은 '생명이 있다'는 신호였던 것이죠.
 
요나단은 다윗을 사무치게 미워해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다윗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다'고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다윗도 요나단만은 신뢰하여 도망중에도 그에게는 자신의 피눈물나는 속내를 다 털어 놓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말씀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사실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와 '내 몸같이'는 똑 같은 표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는 것이죠. 뒤돌아 봅니다. 우리는 누구를 '내 생명을 사랑하듯이'사랑한 적이 언제였던가요. 그런적이 한 두번은 있었다면 그건 도데체 어떤 때 였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랑을 예수님의 계명처럼 우리가 죽는 날 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요.
 
하지만 누군가를 '내몸처럼'사랑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고통에 같이 불편해 하도록 지음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사람도 길거리를 지나다고 불쌍한 걸인을 보면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저들은 나쁜 사람들의 앵벌이를 하는 걸거야'하고 생각하든, '저들은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이야'라고 생각하든 우리는 하나같이 불폄함을 느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뉴스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을 봐도 그렇고 심지어 사실도 아닌 드라마의 비극에도 눈물을 글썽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상하게도 내가 느낀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자기 생명같이'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이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심적 부담을 느낀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대로 살아갈 수 있는 훌륭한 가능성(potential)이 있다는 말이 되고 성경은 그것을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곳은 신경을 죽여 버린 치아와 같습니다. 그곳에는 생명도 희망도 없습니다. 의치로 평생 살아야 하듯이 그곳엔 거짓된 위선의 대체물만이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신의 생명같이 사랑'한 것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자신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다윗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불편해 했던 것입니다. 너무나 큰 부담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행동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웃을 내몸 처럼 사랑하기'를 너무 거창한 것으로 여겨 지레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려운 그들을 향한 당신의 어쩔 수 없는 부담감,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부담입니다. 요나단 처럼 그 부담에 용감하게 응답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문단열 / 성신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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