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입고 시작한 선교사 생활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6월 03일(월) 13:31
   

선교지에 도착했던 1995년 6월, 필자의 두 아이는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초ㆍ중ㆍ고가 함께 있는 현지인 학교에 전학 수속을 하고 두 아들이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 교복을 입고 나섰다. 둘 다 짧은 치마를 입고 샌들을 신었다. 어색해서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아이들을 격려해서 보내고 뒤에서 우리 부부는 조용히 웃었다.
 
피지에서는 남자들이 정장으로 스커트형 치마인 '슬루'를 입는다. 본래 원주민들이 나뭇잎이나 줄기로 만들어 입던 앞가리개를 서양인들이 천을 들여와 남자들이 정장 또는 평상복으로 입게 된 옷이 '슬루'이다. 필자도 평상시 주로 '슬루'를 입는다. 처음에는 숙달이 안 되어 의자에 앉을 때 무의식중에 다리를 벌리거나 책상다리를 하다가 아내에게 주의를 받기가 일쑤였다. '슬루'를 입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거나 뛰어 갈 때는 앞자락을 붙들고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일 년 내내 여름만 있는 피지에서 남자도 짧은 치마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은 내게는 큰 특권이었다.
 
서양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지 중국에 도착해서 중국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피부를 동양인처럼 바꿔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큰 키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필자는 피지인들처럼 피부색을 바꾸고 곱슬머리는 만들 수 없지만, 의복만은 그들의 풍습을 따르며 그들과 접촉점을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현지화 시도는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선교역사는 오히려 당시의 19세기 선교를 식민지주의 선교이며 패권주의 선교였다고 비판을 한다. 그래서 21세기 서구 선교는 토착화 및 상황화 선교를 말하며 현지 문화는 저급한 문화가 아니라 다만 다른 문화일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인 선교사가 가장 패권주의적 선교를 하고 있다고 비판을 받는다. 필자와 가장 가까운 현지인 동역자요 피지 기독교계 원로인 마이카(Maika) 장로는 한 인터뷰에서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태도는 현지 문화의 이해"라고 하면서 "돈과 학벌 등을 앞세워 현지 문화를 무시하는 선교사를 현지인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선교사가 생각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현지인이 바라는 선교사에 대한 겸손한 경청이 필요하다. 선교사가 본국에서 "저는 선교지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라고 하면 대단한 헌신과 결단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선교지는 선교지에 뼈를 묻는 선교사를 원하지 않는다. 현지인들의 입장에서는 현지인을 존중하지 않는 선교사는 나쁜 선교사이며, 병든 선교사는 불필요하고, 현지에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되면 (그들의 입장에서) 지체 없이 떠나주는 선교사가 좋은 선교사이다. 현지인들은 선교사에게 무조건 감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선교사의 생각은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필자가 선교사로 파송될 당시 총회 위탁 선교훈련을 맡았던 이광순 교수는 선교사 파송예배 때 선교사들에게 늘 "선교지에서 사역을 잘 하려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살아만 내라"고 당부 하셨다.
 
아프지도 말고, 어떤 이유로든 도중하차 하지 말고, 선교지에 살아남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그 당시 큰 위로가 됐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특히 현지인들에게 나는 좋은 선교사로서 잘 살아내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본교단 파송 피지 박영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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