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과 소통의 미학

[ NGO칼럼 ] NGO칼럼

김수택 목사
2013년 05월 10일(금) 09:47

함께 나누어 벗하며 사는 상생과 내 것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우리의 것으로 다듬어 가는 소통은 현대사회와 교회에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때와 시절을 아는 지혜를 당부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듬어 보면 때를 알아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옛 성현의 말과도 일치한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만큼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불과 몇 개월 전, 우리는 '상생과 소통'이라는 화두를 받아들이면서 짐짓 기대를 가지며 시대를 읽어보려 노력하였다. 이는 높은 담벼락처럼 막혀버린 일반 대중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정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이 기대는 물거품이 되는 성 싶어 매우 안타깝다. 의식의 전환과 리더십의 전환을 기대한 우리 모두를 또다시 당혹하게 하기 때문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평택 쌍룡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찾아간 작은 일과 한국교회희망봉사단 임역원들이 용산참사현장을 방문하여 위로하였던 일은 새삼 우리의 자리를 확인해준 일이었다.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되겠다는 정치 지도자나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목회자들이 국민을 우롱하는 머슴이거나 신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는지는 모르겠으나, 귓전을 때리는 여론이나 원망을 수용하지 못하는 막힘이 되풀이되는 한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묻는 물음이 그저 어리석을 따름이다. 사람이 귀를 현혹시키고는 스스로를 배반하는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남과 북이 등을 돌리고 아예 위협하는 현 상황이 혹여 우리들의 미숙한 대응 때문은 아니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 하는건 아닐까? 동과 서가 갈라진 이유 없는 갈등은 분명히 책임져야 할 판단이 선 지 오래인데도 때를 읽지 못하는 무리들 탓에 때만 되면 반추해서 이득을 챙기는 정치판에 감히 돌팔매질을 해서는 아니 되는가? WCC(세계교회협의회)총회를 앞두고 1950년대의 추태를 아직도 반복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은 아닌 듯하여 눈을 감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교회가 저들의 추종자가 되어 팻말을 휘두르고, 대형풍선을 띄우다 못해 패거리를 지어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을 매도하는 어리석음 앞에 귀를 막아야 하는건가?
 
지방 어느 교회의 분열과 논쟁은 목회자의 숨을 조이게 하고, 폭력과 감금, 협박과 날조된 여론 휘두르기는 이미 교회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다. 총회헌법을 무시하다 못해 법원의 판결을 획책하여 총회 헌법 정신을 뒤집는 가슴 아픈 일을 목도하고 있다. 20년 전만해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보듬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을 빨간 색안경으로 바라본 우리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교회의 규모에 편승하여 능력과 인격의 잣대로 드러내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상생을 희망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서로 살림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며, 소통을 희망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서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지 못한 탓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 정치 종교지도자들을 사랑함으로써 저들 또한 제자가 되게 하라시는 명령(요 13:31~35)은 새삼스러운 말씀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문제 삼지 않음에 있음을 보여주신 수용과 관용이 이 시대를 읽어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이라 여긴다.
 
상생과 소통은 질투와 미움과 갈등을 긍휼과 화해와 사랑으로 바꾸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나 아닌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단순히 사랑하라는 개념적 이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세워주는 가슴에서 시작된 사랑의 실천이 이 시대가 교회들에 요청하는 부르심일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샬롬의 교제(사 58:13~14)가 우리들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성숙하게 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받드는 소중한 가르침이 살아 있는 공동체로 이끌어 가도록 하기 위하여 눈을 이 땅 백성에게 향하는 슬기를 일깨워 나아갔으면 참 좋겠다.

김수택 목사/새나루공동체 대표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