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의 나의 모습

[ NGO칼럼 ] NGO칼럼

문미라 집사
2013년 04월 30일(화) 17:36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유고는 "사람 사는 목적이 잘 죽는데 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일까? 필자는 노인요양의 직무상 인생의 마지막 여러 모습을 참 많이 볼 수 있었다.
 
누군가 죽음이라는 순간과 마주하였을 때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행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또 다른 낯선 모습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엉뚱한 추한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 때문이다.
 
아무리 품위있게 죽으려고 해도 영혼은 혼돈이 오고 육신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평소 높이 존경받으시던 목사님이나 이름없이 예배드리던 평신도나 어느 누가 어떤 모습일지는 역시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치매나 만성질환으로 몇 해를 고생하다가 불꽃 스러지듯 그냥 눈 감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육신은 비교적 건강한데 노욕과 고집에 얽매어 바둥거리다가 죽는 순간 아쉬워 한숨을 내쉬는 인생도 흔히 본다.
 
'인생은 어차피 미완성'이라는데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는 죽을 때 자기 무덤 묘비문에 유언을 남겼다. "우물 쭈물 살더니만 내 이럴 줄 알았어"
 
여러 해 전 별세하신 어느 성도 한 분이 생각난다. 사망률이 가장 높다는 췌장암에 걸렸는데 통증이 있어 진찰을 받아보니 이미 말기에 가까운 중증이었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오히려 이를 담담하게 받아드린 후 석달의 정리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침착하게 주변을 정리해나갔다. 병세는 더욱 진행되어 몸은 야위고 심한 통증에 복수마저 차올랐다. 얼굴은 창백하지만 온화하였고 언행에 평정을 잃지 않았으며 늘 정갈한 옷을 입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자주 교회에 나가 조용히 기도 하였다.
 
죽음을 며칠 앞두고 약간의 유산을 정리하였는데 수고한 간병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후 남은 전부를 교회에 헌금하였다. 드디어 돌아가시던 날 주위 사람들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며 두려움 없는 선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시던 그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주었다.
 
그는 본래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교회학교를 잠깐 다닌 후 평생을 비신앙의 삶을 살다가 말년에 세례받고 신앙을 찾으신 분이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13:30)
 
육신이 점점 노쇠해지면서도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 같다고 표현하는 인생길을 우리는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죽음과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맞을 수 있을까? 맑은 정신일 때 한번쯤 미리 생각해보자.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자만하며 평소 안이한 생활 속에서 입술의 기도만 드리다가 막상 영육이 약해졌을 때 흐트러진 모습으로 눈을 감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걱정스럽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마11:12) 다시 새롭게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다.
 
공주원로원 양로부장 문미라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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