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를 슬프게 하지 말라- 김기순 집사(하)

[ 향유와 옥합 ]

강영길
2013년 04월 24일(수) 15:45

김 집사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셋째 딸이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 9월에 뇌염에 걸렸다. 보건소에 1주 도립병원에서 2주 합해서 3주를 인사불성으로 보냈다. 결국 병원에서 얘는 더 이상 우리 힘으로 안 된다고 하면서 까만 커튼을 치고 암실에서 사십일 기한을 정하고 생명만 보장하자는 것이다.
 
김 집사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 어딜 데려갈 수도 없고 여기 있어도 안 되니께네 따뜻한 방에 가가 내 품에서 잠이나 재우겠습니다. 저는 아를 업고 갈랍니대이."
 
그렇게 기도하고 아침에 도망치듯이 병원을 빠져 나왔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실종되었다고 난리가 났다. 김 집사가 겨우 버스를 탔는데 비녀를 얌전히 지른 오십대 여자분이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침을 내더니 아이의 미간을 찌르고 몸 여기저기를 찌르는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거의 죽어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 여기저기가 아퍼."
 
그 뒤로 다른 사람들이 뇌염을 김 집사처럼 고쳤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병원에서 포기한 아이를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그 분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인기라요.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셔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김 집사는 그 일 이후 어떤 환난이 있고 바람이 불고 역경이 있어도 하늘나라 갈 때까지 내 자리를 지키고 말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각오로 끝나지 않고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김 집사가 처음 하회 교회에 올 때 일곱 사람이 교회 다녔는데 지금은 다들 먼저 하늘로 갔다. 남은 교인 중에서는 김 집사가 가장 믿음의 어른이다.
 
김 집사는 믿지 않는 시댁에 시집와서 예수를 믿으며 말 못할 핍박을 많이 받았다. 집안 어른들은 야소교를 말도 못하게 비방했다. 야소교 믿어서 밤낮으로 미쳐 다닌다면서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김 집사더러 왜 그리 안 된 쪽으로만 가느냐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교 믿지, 전국으로 새마을 연수원을 누비지, 유아원 선생한다고 하지, 시를 써서 방송국에서 낭송하지, 다도를 하지, 넌 왜 그리 돈이 많이 생기는 쪽으로 안 하고 왜 그리 봉사만 하냐고 어른들이 구박도 많이 했다. 김 집사는 자원봉사를 30년을 했다.
 
김 집사가 신앙생활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전에 교회를 떠나신 목사님과 있었던 일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가 망설여지지만 교인들을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성도들과 교회의 관계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한다고 김 집사는 재우쳐 다짐을 두었다.
 
그 목사님은 기도할 때 기름 낭비한다고 보일러를 안 넣고, 방석을 좋은 것을 드려도 방석도 안 깔고 기도하시고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목사님이셨고 모두의 본이 되었다. 그 당시에 목사님이 58세였다. 그분이 30년 목회를 하셨고 그 중 여기에서 꼭 9년을 시무하셨다. 그런 분이 마치 쫓겨나다시피 떠나가셨다. 교인들 중에는 목사님에게 폭언을 서슴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 김 집사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 네 사람이 교회를 지키고 있고 목사님께 여비라도 챙겨 드렸지만 지금 생각해도 목사님이 그렇게 떠난 것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김 집사는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눈을 못 뜰 지경이었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목회자를 섬기는 자세가 중요하지요. 누구나 다른 색깔을 갖고 있지만도 그 색깔이 하나 되게 하는 분이 하나님 아니요?"
 
보기 드물게도 한옥으로 지어진 교회, 아직도 종을 울리는 교회, 종탑이 참 아름다운 교회, 누구라도 와서 종을 울릴 수 있는 하회 교회를 김 집사는 여전히 꿋꿋이 지키고 있다.

강영길/온누리교회, 소설가, 내인생쓰기 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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