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종 데트르(Raison D'e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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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철 기자 hcahn@pckworld.com
2013년 04월 22일(월) 13:32
기자 생활한 지 어느덧 26년, 생긴 습관 중 하나는 좁고 길다란 취재수첩에 중요한 단어를 필기하는 것입니다. 세월 탓인지 수첩에 적지 않은 것들은 다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다행스럽게 흔적을 남긴 것들은 설교나, 강연, 원고 등에 유용하게 쓰일 때가 많습니다.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프랑스어로 '존재의 의미'를 뜻하는 이 단어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시인 김갑수씨가 쓴 '나의 레종 데트르'라는 책에서 처음 그 단어를 만나게 됐습니다. 이 책은 '쿨한 남자의 종횡무진 독서 오디세이'란 부제가 붙어있을 만큼 문학과 음악부터 여행과 역사 등 세상 모든 종류의 책을 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책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지난 주 제가 섬기는 교회의 원로목사님 별세 소식을 듣고 문상가는 밤 길, 여의도를 지나게 됐는데 벚꽃 맞이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도 어떤 이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어떤 이는 세상에 태어나고, 어떤 이들은 꽃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밀리는 차 안에서 잠시 스쳤습니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봄 날, 미당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을 읽으면 가슴이 설레입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이라는 싯구를 읽으며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요리문답에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고 내가 살아나 이토록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날 대속하신 그 분을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요?
 
한국 교회는 지금 위태롭습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유리벽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세상은 교회에 무관심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더 이상 신뢰하지도 않고 거룩한 곳으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땅에 밟히는 소금이 되고, 세상을 섬기지도 못합니다. 어느덧 교회의 레종데트르는 없어 보입니다.
 
인도에서 전래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수도승이 수 없는 고행 끝에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지에 이르른 고승이 또 다시 수행을 떠나겠다고 하자, 제자들이 의아해 하며 물었습니다. "아직도 수행이 필요하십니까?" 그러자 고승이 "그것을 알기 위해 수행을 떠난다"고 답했다는 겁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고 값진 일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나의 레종데트르입니다"라고 우리 모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날. "작은 이의 벗이 교회의 레종데트르입니다"라고 세상이 인정해 주는 날. 그 날이 속히 오기를 앙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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