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주도 '사바티스의 난'으로 막힌 선교의 문

[ 땅끝에서온편지 ]

장덕인 선교사
2013년 03월 22일(금) 13:38
원주민 인디오들과의 만남
 
머나먼 낯선 땅, 언어와 문화, 풍습과 기후등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삶과 사역을 2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지나온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안에서 하나하나 아름다운 추억이 됨을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 일들을 글로써 표현하고자 하니 그리 쉽지는 않다.
 
어느덧 세월이 흘려 멕시코에 온지 20년이 되었다고 기독공보로 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는 조금이나마 멕시코 선교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글을 쓴다. 멕시코는 인구 1억2천만명, 종교는 95%가 카톨릭이다. 그래도 20년 전보다는 개신교가 많이 부흥되고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1993년도 7월, 어린 두 자녀를 고국의 부모님께 맡겨둔채 우리 부부는 단순한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각각 여행가방 하나씩만 들고, 인구 2천만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인 멕시코 시티에 도착했다. 무비자 협정 전이었으므로 아이들과 함께 오면 입국이 거절될 수도 있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한 에피소드로 선교를 위해서는 자녀들과의 잠시 헤어짐도 불사하다는 각오로 4살, 5살의 어린 자녀들과 생이별을 하고 선교지로 향했다. 바울의 선교열정과도 같이 오직 선교가 먼저라는 마음으로 선교지에 첫 발을 디뎠다.
 
시티에 교민은 천명 정도였으며 한인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각 하나씩 있었다. 체류기간이 1년인 비자 발급을 받기 위해 잠시 시티에 머물면서 앞으로 사역할 선교지인 치아파스주 오코싱코에 여러차례 다녀왔다. 그곳은 멕시코 남부지역에 위치, 과테말라 국경과 인접한 곳으로 원주민 인디오들이 많은 지역이다. 멕시코에서 가장 숲과 정글이 우거진 고온다습한 곳이다. 정착 물품을 갔다놓고 현지사정을 살피며 현지인 가스팔 목사와도 만나던 와중에 세계적으로 큰 뉴스가 됐던 사건이 터졌다. 바로 1994년 1월1일 산크리스토발시에서 농민들이 시청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던 농민반란인 사파티스의 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곳은 선교지에서 불과 차로 2시간 거리였다. 자기들의 땅을 돌려달라는 반란이었는데, 백인계 지주들의 명의로 된 땅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구청의 컴퓨터와 토지대장들을 불태우고 시청과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무장한 인디오들이 정부군과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사태가 조금 완화되자 1월 17일 현지에서 동역할 가스팔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동안 주 전체가 바깥 세상과 단절이 되어 전기와 교통, 물 등 모든 것이 끊어졌고 심지어는 식수도 구하기 어렵고 식량마저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그곳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저는 통역해 주는 집사와 당시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 한명과 시티에서 차동차로 20시간 달려 내려갔다. 지니고 있던 선교비로 콩과 식용유, 물 등을 구입해 트럭에 싣고 무작정 달려가 보니 수 많은 바리게이트와 군인들의 상엄한 경비를 하고 있어 통과를 위해 어렵게 내란 지역의 구청장 허락을 받은 뒤 선교지의 목사에게 구호물품을 전달하고 돌아오자 소문을 들은 대사관에서 이 시점에 거기가 어디라고 다녀왔냐고 했다. 대사관에서는 "앞으로 장 선교사님은 선교지도 바꾸셔야 한다. 이 내란은 멕시코 특정상 장기화 가능성이 있고,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지역에 파송을 받았어도 거기는 안되니 필히 선교지를 바꿔야 하며 필요하면 세계선교부나 파송교회에 대사관 이름으로 선교지 변경 공문을 보내 주겠다"고 공사까지 나서서 말했다. 현지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선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해 5월 후원교회의 명령으로 철수하게 됐다.<계속>
 
멕시코 장덕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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