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월4~9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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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2월 28일(목) 11:20

월-우리 가정을 복 되게 하심은
본문: 창 12:1-3
찬송가: 200장
 
오늘 우리가 예배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믿음을 지닌 가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가정에 은혜와 사랑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의 복과 함께 이 땅에서도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귀하고 값진 일이다.
 
우리가 지닌 이 믿음은 선조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전되어 온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복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 되게 하신 그 약속은 대를 이어가며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된 그 복이 우리 가정에 임하여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믿음의 가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 가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내용과 복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셔서 그의 이름이 크고 위대하게 떨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주신 실천적인 언약은 그를 축복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저주하시겠다는 것이다. 대단한 복이요 언약이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향한 편애와도 같다. 그리고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만민을 향하여 열려있는 복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참 뜻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에 목적을 두고 계셨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우리 가정은 이 말씀을 잘 새겨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가정에 살아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 559장의 구절처럼,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가정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보호와 인도와 복주심의 약속은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통하여 우리 가정에 늘 함께 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복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가정에 유전되어 온 것이다(갈3:7).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정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배와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여 주신 이 복을 누리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신 영생의 복을 우리도 이웃에게 전하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복 주시는 그 사랑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정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행실로, 우리의 말로, 우리의 복음 전파와 사랑으로.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에 복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계획과 섭리를 헤아리며 오늘도 주님처럼 복을 나누어주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창운목사 / 송탄동성


화-사랑의 초대
본문: 요일4:7-11
찬송가: 310장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상처받기도 한다. 세상을 살며 사랑 때문에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두가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랑이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왜 세상은 점점 더 삭막해지는 걸까?
 
우리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일컫는 어머니의 사랑이, 낳은 지 몇 시간도 되지 않는 아이를 비닐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린 사건을 통해 깨어지는 것을 본다. 사랑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전쟁 속에서 버려진 고아들과 죽어 있는 시체들을 보며 사랑이 메마른 세상을 만난다.
 
가끔 해외로 입양된 사람들이 외국에서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면서도 가족을 찾기 위해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본다. 왜 그럴까? 그들은 성공해서 부족함이 없다. 혈연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가족도 있다. 그런데 왜 가족을 찾는걸까? 가지고 있는 성공만으로, 가족만으로 비어있는 부분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사랑이란 그렇다. 이 부족함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사랑을 배워야 한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세상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질된다. 처음에는 불타오르다가 식어간다. 더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갈아탄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다. 천년이 두 번 지나도 하나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부터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세상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며 사람들은 사랑함에도 계산을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랑의 방법은 죽으심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낮고 천한 인간을 위해 하늘보좌를 버리셨다. 인간으로서의 편안한 삶도, 명예와 권력도 원치 않으셨다. 상하고 찢기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도 내어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결코 포기가 없다. 
 
그렇게 사랑해서 무엇을 얻으셨을까? 그 귀한 생명을 버리시고 모든 것을 잃으신 후에 얻은 것은 고작 보잘 것 없는 '우리'이다. 그러나 주님은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얻으셨다고 춤추신다.
 
주님의 사랑은 다 태워 주는 사랑, 모든 걸 다 주어도 행복한 사랑이었다. 주님은 오늘도 못 자국 난 두 손을 들어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를 주의 온전한 사랑 속에 거하는 천국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사랑이 고파서 세상의 왜곡된 사랑 속에서라도 사랑을 갈구하는 미련한 우리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품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준형목사 / 삼각교회


수-운명을 극복하는 삶
본문: 요한복음 9:1-3
찬송: 272장
 
우리 주위에는 '운명(運命)'이란 것에 쉽게 끌려가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은 '어떤 운명' 같은 굴레를 씌워놓고 사람이 그렇게 살도록 '구조화(構造化)'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운명을 극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을 극복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찾아본다.
 
첫째,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만한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해버렸다. 그리고 떠들면서 사정없이 맹인에게 운명의 굴레를 씌워버렸다. 캄캄한 운명이었다. 맹인 자신도 사람들이 떠드는 말을 '도저히 벗어날 길 없는'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운명의 구조화'가 맹인의 삶을 움켜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라는 분으로부터 운명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맹인이 맹인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일'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거룩한 뜻이었다.때로 나에게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사람들이 떠드는 대로의 운명 때문이 아니다. 더 깊고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거룩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아주 특별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새 소망을 갖는 것이다. 한줄기 빛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 맹인에게 소망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 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는 그 일은 무엇일까? 전에 없던 소망이 맹인의 삶에 꿈틀대기 시작했고, 운명에 얽매였던 생각이 새로운 소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과 말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종했다. 그리고 눈을 뜨게 되는 기적 같은 은혜를 체험하고 말았다.
 
새 소망은 우리로 주목하게 하고 능력의 말씀에 순종하게 한다. 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혹 절망 가운데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는가?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절망의 생각에서 깨어나 소망이 주는 특별한 섭리에 주목하라. 그러면 '운명의 구조화'를 깰 수 있다. 새 소망을 품으라. 내 삶에 아무리 가혹한 운명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소망을 붙들면 내 안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하고 창조의 능력이 솟아난다.
 
거룩한 뜻 가운데 새 소망을 품고 내 삶에 펼쳐질 일들을 기대하며, 주목하고 집중하고 순종하라. 오직 주님을 믿고 은혜를 구하면 운명의 극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운명의 장난을 깨버릴 수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도저히 벗어날 길 없던 캄캄한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혀 절망 속에 살아왔음을 회개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소망 가운데 거룩한 새 마음과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운명을 극복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에릭목사 / 상도교회


목-나의 사랑 어여쁜 자야 함께 가자
본문: 아 2:10-14
찬송가: 442장
 
신구약 성경 66권 중 과연 성경에 들만한 가치가 있느냐로 가장 많은 논란을 거친 책이 아가서이다. 남녀상열지사로 여길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경화과정에서 살아남아 성경에 포함된 것은 남녀간의 불붙는 사랑을 통해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사랑의 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은혜의 보좌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간절하게 부르실까?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너무 멀리 벌어져있기에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이 아니고는 도저히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 축복을 축복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 사랑을 사랑으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존재가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향기를 발하거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냄새조차 맡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들어보자꾸나, 함께 만져보자꾸나, 함께 향기를 맡아보자꾸나 하시며 초청하신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밝히 보이거늘 너희가 어찌 십자가대속의 복음에서 멀어질 수 있단 말이냐? 탄식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밝히 보이고 들리거늘 너희가 어찌 알아듣지 못하느냐?고 탄식하신다. 사도요한도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이 보이고, 들리고 만져졌다고 고백한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안이 열리지 못하면, 영적인 귀가 어두우면 말라기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푸념하며 증거를 요구하기 일쑤인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 신약은 반복해서 독생자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약속인 전도의 미련한 것, 즉 케리그마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이다.
 
가족은 특별히 부부는 생명의 유업을 함께 할 사람이다. 그리고 부부간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면 기도가 막힌다. 내가 먼저 오래 참고, 덮어주고 , 감싸주고 생명길을 함께 가야할 사람이라는 말이다. 주님은 "나의 사랑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생명길 함께 가자고 부르시면서, 너와 함께 생명길 가야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신다. 만물이 약동하는 생명의 계절 봄을 맞으며 함께 생명길 가야 할 사람을 생각하며 겸손히 무릎을 꿇자.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생명길 함께 가도록 가족으로 엮어주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처럼 우리의 간절한 사랑과 기도로 우리 모든 가족들이 생명길로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중식목사 / 산돌교회


금-아하와강가의 금식으로
본문: 에스라 8:21-23
찬송가: 288장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포로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과정 중에 가졌던 그들의 마음과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본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귀환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중 오늘 본문은 에스라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두 번째 포로귀환으로 기원전 458년경에 이루어진 일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이 때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므로 고향으로 굳이 돌아가려는 마음이 희박해진 상태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돈독한 신앙의 소유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귀향길로 오르기 전 아하와 강가에 모여 3일간 유숙하면서 귀환준비를 하게 된다. 9천 명 규모의 사람들이 1천5백 킬로미터의 대장정에 오르기 전에 얼마나 준비하고 점검할 것이 많겠는가. 에스라는 무리 중에 성전재건과 성전제사제도 회복에 필요한 레위인이 없음을 파악하고 레위인을 모집하고, 떠나기 전 헌물 받은 금은보화의 관리인도 선정하고, 중도에 만나게 될 지도 모르는 도적들에 대한 대비도 한다. 그리고 길을 떠나기 전, 그는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에스라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이 되도록 간구한다. 
 
우리의 모든 일의 시작도 그런 수순을 밟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시작하든지간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힘써 다하고, 준비사항을 점검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마침이 평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 모든 계획의 결과가 우리의 예측대로 되리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에스라는 바사왕 아닥사스다에게 귀환 길에 닥칠 위협에서 보호해줄 군사들을 요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도움 요청이 부끄러운 일이라 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기 위해 인간적인 도움을 거부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도움을 구하는 부끄러운 경험은 없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에스라는 하나님께만 그들과 그들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간구하였더니 하나님의 응낙하심을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는 본문의 에스라의 신앙고백이 오늘 우리의 삶의 지침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인간적인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궁리하는 것을 중단하고 오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신앙인들이 되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처음은 오직 주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로 시작하도록 인도하옵소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 두리번거리지 말고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혜숙목사 / 전국여교역자연합회 사무총장


토-신앙의 기초 다지기 - 구원의 확신
본문: 로마서 5:6-11
찬송가: 305장
 
목사이면서도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로봇 풀검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베웠다'라는 책을 출판함으로 전 세계에서 밀레니엄 셸러가 되었고 스타강사가 되었다. 어릴 때 유치원에서 배웠던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지식의 단편들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라는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기초가 매우 중요하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건축 구조물은 사상누각과 같아서 하자가 발생하고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기초를 다지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구원의 확신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작은 유혹과 시험에도 쓰러지고 넘어진다. 환난과 핍박이 다가올 때 쉽게 타협해 버리고 만다
 
구원의 확신의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불교가 인생허무에서 시작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나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는 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절망에서 기독교 신앙이 시작된다.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고 고백할 때 우리 마음 속에서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구원의 확신의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 즉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며(요1:12)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게 된다.
 
구원의 확신의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며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이 즐거워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나는 부족하고 나는 허물이 많은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내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해주셨고 내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기에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세속화의 파도가 쓰나미처럼 거침없이 교회에도 몰아닥치고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성도로서의 가치관을 망각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구원의 확신을 다시 다짐으로 세속화의 거센 쓰나미를 헤쳐나가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거센 세속화의 쓰나미가 우리를 덮치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의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음을 확신함으로 죄악의 파도를 넉넉히 헤쳐 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태협목사 / 신곡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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