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실수

[ 목양칼럼 ] 목양칼럼

김영걸 목사
2013년 02월 27일(수) 15:50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듯이 실수가 없는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실수 없이 은혜스럽게 잘 하고 싶지 않은 목회자가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목회를 하다보면 실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수를 하고 나면 얼굴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러나 목회자는 숨을 수도 없고, 숨을 곳도 없다. 다시 강단에 올라가야 되고, 또 성도들을 만나야 된다.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지는 실수들이 있다. 목회초년병 시절에 급히 장례식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연초여서 교구의 상황을 아직 파악하기 전이었다. 장례식 예배를 신학교 졸업하고 처음 인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 품에 안기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거룩하게 그리고 뜨겁게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니 분위기가 냉냉했다. 상황을 살펴보니 돌아가신 분이 남편이었는데, 살아계신 부인 집사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드린 것이다. 여자 집사님 이름이 남자 이름과 비슷하기는 했다.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를 드렸던지 함께 예배드리던 분들이 차마 알려주지를 못한 것이다.
 
한번은 심방 가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렸는데 말씀이 그 가정에 잘 맞지 않았다. 도리어 걸림돌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신중하게 말씀을 전하지 못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우리 교회 부교역자는 예배 인도 시간에 사도신경을 해야 하는데 그만 주기도문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성도들이 주기도문을 그대로 따라해 주었다. 어느 목사님은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신부 입장'해야 하는데, '색시 입장'하고 외쳤다고 한다.
 
특히 설교를 많이 하다보니 강단 위에서 말의 실수를 하게 된다. 말을 시작은 했는데, 중간에 생각하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오면서 말이 꼬이게 된다. 마무리를 하지 못해서 쩔쩔매기도 한다. 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인도하는 모임 때 잘해보자는 의미로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만 특정인을 빗대서 말한 것으로 오해가 된다. 오해가 되고 나면 얼마나 풀기가 힘든지 모른다. 시원하게 하는 말일수록 오해가 되면 시원하게 안 풀린다. 한번은 찬양대가 찬양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찬양을 하라고 손짓으로 지시를 했는데 찬양대가 자꾸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찬양 전에 성경봉독이 있는데 그것을 생략해 버린 것이었다. 실수는 내가 한 것이었다. 어설프게 영어를 사용하다가 발음이 꼬일 때도 있다.
 
목회자의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설교인 것 같다. 아직도 설교가 힘들고, 아직도 설교가 부담이다. 평생 설교의 부담을 지고 가는 것이 목회자이다. 듣기에 거북한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반복하기도 한다. 설교문을 써 놓고 연습할 때는 언어의 속도나 발음의 고저를 잘 조절했는데, 강단에 올라가고 나면 일방적으로 외치고 말 때도 있다. 설교하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더 하여 성도들의 분위기가 냉냉하고 여기에 더 보태서 아내까지 한마디 하고 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목사의 다른 실수는 용서가 된다. 때로는 덮어주기도 하고, 때로운 재미있게 웃으면서 넘길 수도 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설교에는 용서가 인색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실수 없이 설교를 잘 하고 싶다. 언제 나는 설교 잘하는 목사로 인정받게 될까?

김영걸 목사 / 포항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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