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자신들의 영혼을 마차에 팔지 않았다

[ 예화사전 ] 예화사전

김운용 교수
2013년 02월 07일(목) 16:29

[예화사전] 

미국 조지아 주를 중심으로 살던 체로키 인디언은 광활한 대지에서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살던 문명화된 부족이었다. 1828년, 그 땅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백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1천3백킬로미터 떨어진 오클라호마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는 여정에서 1만 3천 명 중 약 4천여 명이 죽었다. "지난 일을 모르면 앞일도 잘 해낼 수 없다. 자기 종족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면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는 법이다"며 체로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부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기록된 책,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아름드리미디어)에는 그 눈물의 여로를 그렇게 들려준다.
 
어느 날 정부군 병사들이 찾아와 다른 곳에 이주해야 한다면서 강압적으로 서류에 서명하게 했다.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빙 둘러싸고 총으로 위협하며 소, 돼지처럼 원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의 다 잡아들였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차와 노새를 가져와 체로키들에게 타고 가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제공한 마차를 타지 않았다. 병사들은 앞과 뒤, 양옆에서 말을 타고 호송했지만 체로키 남자들은 앞만 보고 걸었다. 땅을 내려다보지도 않았고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뒤를 따라 걷던 여자들과 아이들도 병사들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긴 행렬의 맨 뒤쪽에는 텅 빈 마차가 따라왔다. 체로키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마차에 팔지 않았다.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체로키들은 자신의 영혼을 빼앗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향 산에서 멀어져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체로키의 혼은 약해지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노인들은 까마득한 그 여정을 이기지 못했다. 처음엔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었지만 점점 죽은 사람이 많아지자 사흘에 한 번만 매장할 시간을 주었다. 대신 죽은 사람을 수레에 싣고 가라고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직접 안고 걸었다.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여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고, 아침엔 다시 그 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길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지만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고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부르지만 체로키들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타협과 굴종의 길은 쉽지만 신앙의 길은 멀고 고통으로 가득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타협하고 변질된다. 정일근 시인은 흔해서 보이지 않고 길가에 짓밟히는 작은 민들레도 "하늘로 꽃대 / 단숨에 쑥쑥 밀어 올리는 / 마지막 자존심은 있다"고 노래한다. 우리에겐 과연 세상의 마차에 영혼과 믿음을 팔아버리지 않을 그 자존심이 있는 것인가?

김운용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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