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의 상생과 대화

[ 논단 ] 종교간의 상생과 대화

황순환
2013년 01월 31일(목) 14:49

[주간논단]
 
이 글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독자적인 '복음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은 채, '타 종교인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 해법을 모색하려는 필자의 소박한 시도이다.
 
한국 사회의 종교적 상황을 나타내주는 상징어로 종교 다원주의를 들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에 관한 저서와 보고서들은 하루가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쌓여가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주체 개념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에 관한 상세한 검증 의지를 보이는 문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국의 정통 기독교는 '예수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보는 이른바 보수주의 신학관으로 종교 간의 대화에 미온적이며, 심지어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비판을 수없이 받아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통 기독교에 맞서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삼위일체 이격(異格)에 해당하는 신으로서가 아닌 참기독교인의 예증으로 보고 구원에 이르는 길에는 기독교 외에도 다른 길이 있음을 주장하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피터 버거(Peter L. Berger)가 지적했듯이 "종교 간의 상생과 대화는 각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당면해야 하는 당위"로까지 생각된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종교 간의 대화는 금세기 하나의 새로운 종교현상으로 자리매김을 한지 이미 오래다. 종교 다원주의라는 말은 이미 신학을 전공하는 신학도들에게는 상식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 또한 전투어 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말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이것에 찬성하든가 반대하든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 다원화 현상이란 먼저 여러 종교들이 한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함을 뜻한다. 그런데 공존한다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같이 있음'의 뜻으로서 어느 한 종교만 독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가 상호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같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다원화 현상의 내용에는 그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종교 간의 상호 이해와 협력이 무엇보다도 요청된다는 의미가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종교 다원화 현상이 한층 더 강조되는 것은 지구 전체가 하나의 사회, 이른바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다양한 종교의 모습과 역할이 특별히 두드러져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나 종교 간의 대화는 우리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지만, 기독교의 내적인 본질을 훼손시키는 대화여서는 안 된다. 이런 까닭으로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종교 간의 평화적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종교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새로운 종교 신학의 정립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각기 다양한 종교의 공존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 수 세기 동안 종교 간의 갈등과 분쟁이 세계사에서 긴장을 조성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종교 자체의 본질과 종교 간의 상호작용, 나아가 현재 팽배하고 있는 다원주의적 경향 속에서, 종교가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해 구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심각하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필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종교의 전통 안에서의 대화나 협력을 넘어서는 창조적 자기변화를 지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복음의 본질과 우월성을 말하되 타 종교 안에도 철학적, 도덕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통한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우리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황순환 / 대전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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