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아요"

[ 문화 ] 이방인 통해 본 한국사회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3년 01월 31일(목) 10:41

이방인의 눈을 통해 본 한국사회의 실상 … '내 이름은 욤비' 펴낸 욤비 토나 씨 

"한국에도 난민이 있다고?"
 
지난해 '난민 등의 지위와 처우에 관한 법률(난민법)'이 제정돼 오는 7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사실 우리 주변의 난민들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지난 1992년 우리나라가 유엔 난민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한 이후 난민 신청자는 총 5천69명, 난민으로 인정받은 외국인은 3백2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4천4백79명은 거절을 받았다는 얘기다.

   
 
3백20명 중의 한 사람인 욤비 토나 씨(인천산성교회, 47세)가 최근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를 부제로 한 책 '내 이름은 욤비(이후출판사 펴냄)'를 출간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우리나라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콩고비밀정보국(ANR)에서 일하던 중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려다가 국가 기밀 유출죄로 수감됐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 한국으로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왜 한국까지 오게 됐냐'는 질문을 항상 받는데, 사실 제 선택이 아니었어요." 지난달 25일 걸스카우트 회관에서 열린 살롱 드 어필 모임에 초대된 욤비 씨는 평소 상상했던 난민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이 중년 신사는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콩고에서 7백만명이 죽었다. 어쩌면 여러분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며, "스마트폰에는 콜탄이라는 원자재가 들어가는데 전세계 콜탄의 80%가 콩고에 있다. 콩고의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 서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떠나온 조국의 현실을 소개했다.
 
그가 들려준 삶의 이야기는 여느 영화 못지 않게 드라마틱했다. 한국에서 처음 구직에 나설 때의 일이다. "정장을 입고 준비를 마쳤는데 '그옷으로 갈거냐'면서 청바지와 티셔츠를 주시더라구요. 당연히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공장이었던거에요." 콩고에서 최고 엘리트층에 속했던 욤비 씨는 그렇게 처음 육체노동을 접했다. 월급은 숱하게 떼였고 탈장으로 쓰러지고 기계에 팔이 끼인 적도 있다. "야간 근무 중 새벽 3시에 팔이 끼어서 사장님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는 오지 않았어요. 사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너무 많아서 한 번 시작하면 일주일이 금방 갈겁니다."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받기까지 파란만장했던 6년의 시간 동안, 그의 곁에는 힘이 되어주는 한국인 친구들도 많았다. 난민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사회적기업 에코팜므의 박진숙 대표와 남편 김종철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가 대표적이다. '내 이름은 욤비'는 욤비 씨가 구술로 풀어낸 이야기를 박 대표가 쓴 것으로 김 변호사는 "두 가족이 다함께 여행하는 것이 꿈"이라며, "욤비 씨의 삶이 난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줬으면 한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직접 팀을 꾸려 법무부를 대상으로 한 행정소송을 돕기도 했다.
 
성공회대 NGO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욤비 씨는 국내 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에서 일한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아시아태평양 난민권리네트워크'의 어드바이저로도 활동 중이다. "난민 없이 난민들을 위한 일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그는 두가지 꿈이 있다고 했다. 첫째, 고국으로 돌아가 콩고를 바꾸는 것 둘째, 아시아 지역의 난민들을 돕는 것. 이 책은 어디론가 달려가는 소년의 그림을 표지로 하고 있다. 중년의 욤비가 소년 욤비를 향해 말했다. "마치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어떤 것도 그를 멈출 수 없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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