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하는 農夫의 생명살리는 農業' 원경선의 삶과 죽음

[ 교계 ] 원경선선생이 주는 울림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3년 01월 28일(월) 13:59
"내 평생의 직업은 전도하는 농부올시다"
사람을 풀무질하면 쓸만한 인간이 된다 '풀무원공동체'
창조질서 보전하는 유기농에 감명 '정농회' 설립
"타협하느니 문을 닫겠다" 거창高 이사장, 한국 기아대책 초석

   
 
한국 유기 농업의 개척자 원경선 풀무원농장 원장이 지난 1월 8일 향년 1백세로 별세했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 간 1백세의 촌로(村老)의 삶과 죽음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기에 매스컴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그의 삶과 죽음은 한국교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원경선 선생은 농사꾼이자 복음전도자였다. 스스로도 "내 평생의 직업은 오로지 전도하는 농부"라고 밝힐 정도였다. 1914년 평남 중화군 상원면에서 태어난 원경선 선생은 11살 때 황해도 수안으로 이사한 후 교회에 출석하게 된 후 성경과 신학문에 몰두하게 됐다. 누구보다도 학문적 호기심이 많았지만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초등학교마저 다닐 여유가 없어 장학금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학업을 이어가다가 결국 아버지의 죽음과 빚 때문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린 나이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을 결심한 그는 18세부터 전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농사는 단지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신앙 원칙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부러움을 사던 농장을 두고 서울로 올라와 농장 허드렛일, 우유배달, 우유장사, 사진사 등을 하기도 했으며,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인서사(타이핑을 대신 쳐주는 곳)를 차리기도 했다.
 
해방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원경선은 사업가로 변신해 토목건축 청부업으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흙으로, 복음 전하는 일로 돌아왔다.
 
부천에서 농사와 함께 복음전도를 시작한 원경선 선생은 농업과 함께 청소년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원 선생의 사역은 인근의 미군 부대에까지 소문이 나 군목들이 그를 방문해 여러 부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날 미군들은 당시 그곳에서 일하던 고아 청소년들을 맡아 교육시켜 달라고 부탁해왔고, 원 선생은 고아들을 자신의 거처로 불렀다. 낮에는 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농사기술을 가르치고 밤에는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이 그와 함께 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규모의 공동체가 형성됐는데 원 선생은 이 공동체를 인간을 풀무질해서 쓸만한 인간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풀무원 공동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 공동체 생활을 하며 복음전파 및 농사를 지으며 살던 원 선생은 1974년 일본의 대표적인 유기농 신앙공동체인 애농회 창시자인 고다니 준이치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
 
일본을 방문해 고다니 준이치 선생의 신앙과 사역에 감동을 받은 원 선생은 이듬해 그를 자신의 농장으로 초청, 친구 30여 명과 함께 강의를 들으면서 유기농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고다니 선생은 그곳에서 "생산력 증대를 위해 생명을 죽이는 농업을 하는 일본의 현대농업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생명을 보존하는 농업을 하라"고 충고했다.
 
1976년 1월 또다시 고다니 선생을 초청해 강연을 들은 원 선생, 오재길 선생(정농회 초대회장) 등은 "우리도 일본 애농회 같은 단체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해 그 이름을 '정농회(正農會)'라 이름 짓고 유기농 농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원 선생의 실험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첫해 당시 돈으로 5백만 원, 둘째 해에는 3백만 원을 손해를 봤다. 또한 당시는 군사정권에 의해 오로지 증산만이 미덕인 시기로 오히려 감산을 초래하는 이 운동을 국가 정책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했고 심지어는 '빨갱이' 아니냐며 이념적인 공세를 가하기도 했다. 원 선생은 극심한 자금난과 한밤 중에 몇번이나 벌떡 벌떡 일어날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굶어 죽는 일은 없다'는 신념으로 3년째 다시 유기농을 시도했다.
 
유기농을 시도한 지 3년만에 땅은 힘을 얻었고, 당시 건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던 때라 유기농산물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여기에 각종 일간지 등 매스컴에서는 유기농산물과 그의 성공에 대해 앞다퉈 보도해 국민적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원 선생 본인도 유기농산물로 건강을 되찾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15세부터 간디스토마에 걸려 자주 피를 토하고 항상 어지러웠는데 유기농을 하면서 자신이 직접 재배한 현미를 먹은 후부터는 그 증상이 말끔히 없어졌다고.
 
원 선생은 그 이후 유기농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며 1991~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UN환경회의에 아시아 농민으로는 최초로 '한국의 유기농 현상'을 주제로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복음전도, 유기농 이외에도 교육과 국제구호활동에도 큰 획을 그었다. 그는 1961년부터 2006년까지 경남 거창고의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거창고는 군사정권 시절 세 번이나 폐교 위기에 몰렸으나, 그때마다 그는 "타협하느니 차라리 학교 문을 닫겠다"며 굴복하지 않았다.
 
1988년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서 국제기아대책기구 행사를 보고 곧바로 국제 본부에 가입의사를 전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해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설립의 초석을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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