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 예화사전 ]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김운용
2013년 01월 24일(목) 13:22

[예화사전]

필립 얀시는 그의 책에서 정교회 사제인 안토니 블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블룸은 격변기에 태어나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러시아와 이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난민 신분으로 프랑스로 피난했다. 거기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외과의 수련을 받았다. 무신론자로 살던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나중에 정교회의 사제가 되었다. 굴곡 많은 삶을 살았기에 오직 성공과 출세만을 위해 분주하게 달렸다. 의사로 환자를 검진할 때 대기실에 기다리는 환자가 몇 명인지에 늘 마음을 두고 살았다. 환자는 그에게 성공과 부를 가져다주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술이 끝나고 돌아서면 그 환자에 대한 모든 것은 완전히 잊었다.
 
그렇게 오직 출세만을 위해 달리던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 먼저는 환자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었는데 눈앞에 앉아있는 환자를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라는 조급증이 들면 일부러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고 서두르는 마음을 가라 앉혔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루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늘어나는 것을 발견한다. 같은 질문, 같은 절차를 쓸데없이 반복하는 실수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분주함이 자신을 이끌어 가려고 할 때 'No!'라고 말하는 순간 시간은 온전하게, 내면의 긴장 없이 사용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일분일초가 정말 일분일초답게 흘러가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5분을 30초 만에 달아나 버리는 것처럼 살지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훈련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기에 현재의 삶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던 일을 멈추고 마음을 추슬렀다. 분주한 일과 속에서 종종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하나님의 임재 안에 나를 밀어 넣으려고 했다. 조바심이 들 때마다 잠깐씩 5분 정도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런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분주한 일정으로 돌아가면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다. 뜻밖에도 5분을 한가하게 쉬면 나머지 세상도 그만큼을 기다려주었다. 과제를 처리하는 게 제아무리 급박하다해도 3분, 5분, 아니 10분 정도의 여유를 낼 수 있었다. 잠깐 짬을 냈다가 다시 시작하면 더 평온하고 신속하게 과제를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틈틈이 멈춰 서는 훈련을 하면서 기도 일과를 만들었다.
 
하루의 분주한 삶 속에서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마음의 여유와 평온을 찾았을 때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눈을 뜰 때마다 어린 시절 러시아에서 보았던 순백의 설원처럼 넓게 펼쳐지는 것을 그는 경험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하나님의 사자로서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저녁이면 그날 일어난 일들을 차근차근 돌아보며 잘됐든 못됐든 모든 일에 감사했으며, 하루를 통째로 하나님 손에 올려드리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산다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의 연속"이 아니며, "삶은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자신의 몸으로 살아내는 경기장"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도종환 시인은 '등잔'이란 시에서 그렇게 속삭이고 있다.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 심지만 뽑아 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 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 하랴 / 욕심으로 나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 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

김운용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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