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한다

[ 예화사전 ] 사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김운용교수
2013년 01월 17일(목) 13:09

[예화사전] 

이정록 시인은 어머니를 주제로 시를 잘 쓰는, 아니 어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시에 참 잘 담아내는 시인이다. 언젠가 그의 책, '시인의 서랍'(한겨레출판사, 2012)에서 '교무수첩에 쓴 연애편지'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역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한편의 시처럼 엮어 놓은 아름다운 글이었다.
 
아버님이 떠나신 다음 해였나요? 제가 고향집에다가 교무수첩을 하나 놓고 왔지요. 새 학기가 되면 참고서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선생님들의 호감을 사려고 교무수첩을 나눠주거든요. 그중 하나를 집에 놓고 왔는데, 어머니가 그곳에다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겁니다. 어머니의 편지는 정말 아름다운 상형문자이지요. 학교 문턱이라고는 자식들 운동회 때 가본 게 전부인지라, 어머니의 한글에는 거의 받침이 없지요. 어머니의 한글을 볼 때마다 한글 받침 무용론이라도 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제가 군 복무 할 때 받았던 어머니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사라하느 내 아더라." 그걸 읽는데 어찌나 눈물이 솟던지, '울컥'이란 말을 새삼 깨달았지요.
 
사실, 어머니한테 연서를 받으실 만큼 아버님께서 잘하신 건 아니잖아요. 알코올중독에, 긴 병치레에, 농사꾼으로는 전혀 안 어울리는 흰 손가락에, 가족보다는 남에게만 베푸는 방향 잃은 성품에, 자식들은 고갤 저었으니까요. 교무수첩이 하늘까지 잘 배달되어, 그곳 술판에서 흰 구름 내려다보며 즐거이 읽으셨으면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 갈수록 아름다워진다는 거예요. 엊그제는 초롱산 건너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대요. "큰애야. 아버지가 괜히 술 드신 게 아니다. 난 니 아버지 다 이해헌다. 동생들 셋이나 잃고 술 아니먼 워떻게 견뎠겄냐? 고만큼이라도 살아준 게 난 고맙다. 그래도 막내 고등학교까진 마친 다음에 가셨잖냐?"
 
요즈음엔 어머니를 안고 블루스를 추려고 해도 어머니가 착 안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입방아를 놓았지요. "어머니, 저한테 남자를 느껴유, 어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아녀, 이게 다 붙인 거여.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미친 놈, 남정네는 무슨?" 어머니의 볼이 붉어졌지요.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없어야." 사랑받는 일에서만큼은 정말 아버지가 부러워요.
 
아마도 시인은 지금 노모를 모시고 가서 노래방에서 블루스를 한판 멋지게 춘 것 같다. 그 작은 사건에서 시인은 어김없이 어머니의 지혜를 시로 옮겨놓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한다'는 지혜 말이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지 못하고 떠난 아버지도, 남편도 한 여인의 사랑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우뚝 세워진다. 사랑의 가슴을 안고 살면 시인이 되고, 그는 힘든 세상을 아름답게 채색할 수 있다. 이정록 시인의 시의 8할은 이 사랑의 시인인 어머니에게서 얻은 지혜로 채워져 있다. 시인의 어머니는 아들을 통해 발굴된 시인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세상은 함께 세워가는 것이며, 서로를 향하는 사랑의 가슴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새해를 시작하며 무엇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지 가슴 깊이 새길 일이다.

김운용교수/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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