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의 벗

[ 논설위원 칼럼 ] 레 미제라블의 벗

황해국목사
2013년 01월 09일(수) 15:21

[논설위원 칼럼]

우리 총회는 총회 창립1백주년을 맞이하여 97회기 총회의 주제를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마25:40, 레19:18)으로 정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벗, 다음세대의 벗, 장애인의 벗, 다문화가족의 벗, 북한 동포의 벗이라는 부제를 택했다. 이러한 주제를 선정하는 데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총회의 고뇌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양적으로 급성장한 한국교회는 최근에 들어와서 급속도로 사회적인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기독교적 경향과 반이성적인 성향이 우리 사회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학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이제 총회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교회가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최근 영화계에서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라는 영화가 신년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이 영화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레 미제라블이라는 말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했지만 빅토르 위고는 주인공 장발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법률과 관습, 풍속 때문에 사회적인 처벌이 생겨나고 이 처벌에 의해 문명의 한 복판에 인공적인 지옥이 만들어져 신이 만들어야 할 숙명이 인간이 만드는 운명에 의해 헝클어지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다.
 
사실 작은 자, 불쌍한 레미제라블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미국의 고대사학자 로버트 냅은 로마제국을 떠받친 레 미제라블은 해수면 아래에서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빙산을 떠바쳤던 존재들(Invisible Romans)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평민 남녀, 노예, 해방노예, 군인, 검투사, 매춘부, 산적이나 해적 등 사회의 하층구조들이었다고 했다. 어느 사회든 어느 시대든 약하고 소외된 사람은 늘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이나 배려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사셨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를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힘과 영향력은 큰 건물을 짓고 세속적인 권력을 잡고 많은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세상의 작은 자들, 레 미제라블들을 존중히 여기고 배려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과 애환을 함께 나누었을 때, 그곳에 복음의 위대한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작품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19년 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중년이 되어 출옥한 다음 그는 전과자라는 것 때문에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장발장은 하룻밤 숙식을 제공한 미리엘 주교의 집에서 은식기를 훔쳐 도망했다가 다시 체포된다. 그 때, 미리엘은 그 은식기는 자신이 준 것이라고 증언하고 은촛대까지 얹어 주었다. 장발장은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존경받는 사람으로 변화를 하게 되는데 그가 진정한 사랑의 힘을 깨닫고 변화되는 결정적인 기회가 바로 이때였다. 레 미제라블이었던 그가 감동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은 한 사제의 진정한 사랑과 배려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도 급성장과 양극화로 인해 우리 주변에 레 미제라블들이 많이 있다. 바로 이들 가난한 자, 다음세대, 장애인, 다문화가족, 북한 동포들이 레 미제라블이다. 한국교회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다시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그들의 벗으로 다가간다면 우리 사회는 다시금 교회를 존경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주제를 정했다면 이를 얼마나 잘 실천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배려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과 만남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옛말에 해불양수(海不讓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바다는 어느 강에서 내려오는 물도 사양하지 않고 다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Zelem)으로 만드셨다. 모두 다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들이다. 복음도 이와 같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제 한국교회가 큰 바다처럼 모든 이들을 품고 받아들여서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작은 자들, 그들 역시 우리의 형제요, 가족이며, 우리의 벗들이다. 우리 모두 레 미제라블의 벗이 되어 진정 복음의 가치를 새롭게 세우고 잃었던 존경과 영성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황해국목사 / 일산세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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