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 영화 '아무르'

[ 말씀&MOVIE ] 영화-아무르

최성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3년 01월 04일(금) 15:32
[말씀&MOVIE]

아무르(미하엘 하네케, 드라마, 15세, 2012)

세계는 지금 고령화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노인의 삶은 젊은 관객에게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만 느껴진다. 세대 간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로를 공감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화제가 된 영화 '죽어도 좋아'(박진표, 2002), '그대를 사랑합니다'(추창민, 2011)는 노인의 삶을 다룬 것으로 어느 정도는 대중의 관심을 끌었지만 전세대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비교적 전세대의 관심을 일으킨 <은교>(정지우, 2012)는 나이듦의 문제이지 노인의 삶 자체는 아니었다.

'아무르'는 '하얀 리본'(2009)에 이어 2012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감독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다. 이 영화 역시 노인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노인의 사랑이야기만으로 볼 수 없는 영화다. 마치 실내악 연주와 같은 구도로 짜여진 '아무르'는 노인의 삶과 질병 그리고 죽음을 통해 세대를 아우르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이야기여서 세대를 넘어 공감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스포일러 있음)

제목 '아무르'는 '사랑'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감독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조금은 다른 시선이다. 노인의 사랑 그 이상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하고 있다.

영화는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면서 시작한다. 119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경찰과 함께 빈 방에 들어선다. 테이프로 밀폐된 방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주변에 꽃잎으로 장식한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여자 시신을 발견한다. 영화는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듯이 전개된다. 그 후에 이어지는 장면은 피아노 연주회장이다. 이곳에 참석한 노부부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무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감독은 비교적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집을 나서는 장면과 연결시켜 보면 마치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삶과 죽음의 순환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이야기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음을 환기하기도 한다.

음악가 출신의 80대 노부부에게 일어난 일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것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시작된 아내를 곁에서 지켜보고 간호하는 남편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영화는 시종일관 노인의 삶에서 흔히 있는 병과 죽음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루할 정도로 서서히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관객은 삶과 죽음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남편의 사랑과 고뇌를 분명 공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단지 노인의 삶과 죽음만을 다루지 않는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묻고 또 대답하고자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 있을 때 그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무척 감상적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감독은 전혀 감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단순한 이야기를 메타포를 통해 보다 깊이 있게 해주고 또 강한 문제의식을 통해 노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거쳐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 감독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감독은 도대체 무엇을 두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곧,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아내에게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아무런 놀라움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며 함께 고통당하기를 피하지 않는 일이고, 그런 가운데서도 아내를 존중하기를 끝까지 하는 일이다. 또한 그런 계기를 통해 아내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어가는 아내에게 남편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인 것이다.

평생을 살면서도 그 혹은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대개는 반려자라는 이름으로 지내다가 이름과 함께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 혹은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또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인간은 부재를 통해 오히려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같다.

끝으로 영화에 나오는 존엄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슬란드 영화 '볼케이노: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루나 루나슨, 2012)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데, 남편은 중풍으로 고생하는 아내의 건강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어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일종의 강제적이며 비자발적인 안락사인데, 보기에 따라서 자발적인 안락사 곧, 인간답게 죽을 권리에 따른 죽음 곧, 존엄사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는 그것 역시 사랑의 하나로 표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과연 적절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왜 끝까지 지켜보지 못한 것일까? 아내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 역시 사랑의 한 표현은 아니었을까? 영화적인 표현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기에 많은 논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