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들을 위한 '엄마해결사'

[ 여전도회 ] 엄마해결사 황화자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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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1월 02일(수) 11:21
[작은자들의 어머니 황화자 총무]

*작은자복지재단이 펴내는 '선교와 사회복지'에 연재되고 있는 고 황화자총무의 일대기를 여전도회면에 게재한다. 이 글은 영성교회 김창렬목사의 회고글 중에서 발췌했다.

1979년도 농촌자립대학을 위해서 호주로부터 젖소와 돼지순종과 헤어포드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김진홍목사와 여러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김진홍목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를 돕기 위해서 이화리교회와 남양만 두레농장을 찾아다니며 수습하면서 황화자총무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황 총무는 당시 서독에서 어린이집과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시설들 돕는데 앞장섰으며, 일본의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남다른 한국 사랑에 그분이 일본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황 총무와 겪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본다. 첫 번째 이야기는 황 총무는 남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긍휼의 마음의 소유자였다. 한번은 이화리 장안이라는 곳으로 함께 가는데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8살 정도 되는 꼬마아이가 시각장애인 아버지와 지팡이를 서로 잡고 집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황 총무의 시선이 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아이는 다 떨어진 여름 옷에다 손발에 동상이 걸려 얼어 터졌는데도 그것을 알 길이 없는 아버지는 술에 취해 신세타령을 하며 걸어가는 두 사람을 뒤를 따라가 보니 집은 쓰러져가는 오막살이에 떨어진 가마니가 방석이었다. 벽은 도배도 하지 않고, 문은 문풍지가 다 떨어져서 바람이 통하는 집이었다. 그 현장을 보고 장시간 눈물을 흘린 황 총무는 "이분을 어떻게 보호해 드릴까?"라고 혼자 말을 하더니 기도를 시작했다. 그 후 어느 기도 모임에 가서 그 소식을 눈물로 호소하자 한 후원자가 나섰고 그 도움으로 서울로 거처를 옮겨 아버지는 안마와 침술을 배우게 했고, 아이에게는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사인데, 목사인 나는 예사롭게 지나가는데 전도사인 황 총무는 예수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는 생각에 '목사인 나는 무엇이냐?' 너무나 양심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한 번은 나와 함께 광주 박종삼 교수가 운영하는 재소자를 위한 시설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말썽 많은 재소자들이 모두 다 뛰어오며 "어머니! 총무님!"하며 손을 잡고 반기는데 목사인 나에게는 손잡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 재소자가 "어머니, 신발 닦는 장소가 좋은 데가 있는데 3백만원만 있으면 된대요. 그것만 해결해 주면 확실히 돈벌고, 교회 다니고, 결혼해서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황 총무는 "그래 기도해자"라고 대답을 하더니 어느 세미나에서 3백만원을 모아 그 청년에게 구두방을 차려주었다.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황 총무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도 결코 내색하지 않고 작은자들을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작은자들을 돕기 전 반드시 그 가정을 돌아보고 어떻게 하면 그 가정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런 던 중 장애인들과 오갈데 없는 노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 쉼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작은자의 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때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 두레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응수목사와 가납교회 서기봉목사를 만나게 됐다. 그 분의 도움으로 30평의 조립식 건물을 지어 장애인 가족과 여러 명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도록 도왔다. 처음 시설을 지을 때 포크레인을 동원할 비용이 없어 한응수목사 가정과 당시 서홍석집사가 삽으로 기초를 다지고 조립식 건물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그 작은자의 집에 이승재전도사가 함께 생활하며, 장애인들을 돌봤는데, 시설에 장애를 가진 아동을 보내면서 '작은자의집'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셨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곳에 입주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천국에 와있는 것 같은 해맑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사연이다. 서독과 동독이 통일될 무렵 독일로부터의 한국 지원이 중단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당시 우리 예장 통합 총회에서 운영하는 선교원 시설장 14명이 모여 황화자총무를 중심으로 앞으로 5년 동안 자립계획을 세웠다. 황 총무의 열정적 헌신은 우리 모두를 이끌어 가기에 충분했으며, 작은자 운동은 국내ㆍ외로 확산되어 소년ㆍ소녀 가장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매년 5백여 명씩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면서 황 총무는 딱한 사람을 보면 예수님의 발이 멈춘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기도하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결사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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