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하나님! 레미제라블

[ 말씀&MOVIE ] 영화-레미제라블

최성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2월 27일(목) 10:06
[말씀&MOVIE]

레미제라블(톰 후퍼, 드라마, 뮤지컬, 12세, 2012)

가난은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구조의 문제인가? 만일 정의와 평등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가난에 대한 책임은 개인에게 돌아간다. 일을 할 기회가 있음에도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열심을 내는 만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고, 열심을 내는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 부는 세습되고 부자와 결탁된 정치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며 향유한다. 전체 국민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출발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평등하지 못하고, 법은 힘 있는 자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 그래서 구조적인 악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일컫는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역사는 크게 두 가지 해결책을 통해 진행되었다. 하나는 급격한 사회변화를 통해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해서 역사의 각종 혁명은 이런 목적에서 일어났다. 다른 하나는 도덕의 갱신을 통해 그리고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등의 선한 영향력을 통해 세상을 점진적으로 개혁하려고 한다. 역사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통해서 굴러가는 것 같다. 세상은 혁명을 통해 바뀌기도 하고 개혁이라는 온건한 방식을 통해 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혁과 혁명의 선택은 시대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원론적으로 제시될 수는 없다.

빅토르 위고가 1845년에 시작하여 17년간의 작업 끝에 1862년에 완성되어 간행된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소설 '레미제라블', 한국에서는 '장발장'으로 많이 알려진 이 작품은 당시의 사회상(나폴레옹 시대에서부터 루이 필립 왕까지의 사회상)을 담고 있는 대 서사시인데, 앞서 제시한 문제의식을 갖고 쓴 글이다. 위고가 보수주의에서 진보적인 입장으로 바뀐 후에 쓴 소설이라 사회혁명에 공감하는 내용을 많이 읽어볼 수 있다. 그러나 용서와 사랑의 가치를 부각하고, 다분히 도덕의 갱신과 선한 영향력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제목의 뜻은 '비참한 인간들'이라는 뜻으로 내용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32년 6월 5일 붉은 기를 높이 세우며 가구의 집기들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경찰과 대치했지만 시민의 비협조로 쓰러져야만 했던 시민혁명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국민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제1 계급(가톨릭 고위 성직자)과 제2(귀족) 계급의 사람들이 전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 곧, 앙시엥 레짐에 대한 불만으로 봉기한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전개된 숱한 정치적인 질곡은 프랑스 민중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소설은 바로 이 시기에 가난과 비극적인 삶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부와 권력의 노예로 살아가는 불운한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역사 속의 한 시대와 인간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배경이 되는 대혁명 이후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이해하면 영화를 더욱 심도 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당시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두 명의 인물과 시민혁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우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댓가로 5년의 형을 선고받았지만 4번에 걸친 탈옥시도로 총 19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주인공 장발장이다. 장발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주로 제도적인 측면을 조명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냉대를 받으며 사는 여성 판틴이다. 당시 여성과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편견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데, 미혼모라는 사실이 알려져 직장에서 쫓겨난 판틴은 생계와 딸의 양육비를 위해 머리카락, 이빨, 심지어 몸을 팔며 살아가다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부와 권력에 눌려 살며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며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신음하면서도 신의 자비를 기대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비참한 삶의 모습을 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학생들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서 살다 죽은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계기로 혁명을 일으키려 하지만 화력과 인원의 열세로 실패하고 만다.

이미 오래 전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개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자하는 이유는 분명 오늘 우리들의 현실과 맞닿는 부분이 있어서 공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와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어 있을 때 민중이 어떻게 비참해지는지, 양극화 현실에서 사회의 그늘에 밀려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고민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신정론적인 문제의식과 함께 그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보면 현실은 물론이고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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