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12/15

[ 가정예배 ] 12/1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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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06일(목) 14:52

[가정예배]

월-베들레헴에 계신 그리스도
본문: 마태복음 2:1-12
찬송가: 90장

대강절 절기가 시작되었다. 대강절이란 동방박사들처럼, 그리고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그리스도의 강림을 신앙적인 절기로 맞이하는 기간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종교적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모든 종교의식을 자기들이 주관하는 등 종교적인 모든 사건이 자기들 손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헤롯왕은 유대나라에 살고 죽는 모든 것은 왕의 권력 아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착각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손에 미치지 못하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 웅장한 성전이 있고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왜하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
 
인간적인 생각이라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셨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
 
둘째, 약속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미가서 5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류를 인도하실 목자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변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다.(히브리서 6:18)
 
셋째, 탄생하실 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베들레헴 여관에는 있을 곳이 없었다.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구유만이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데 적당한 곳이었다. 베들레헴에는 가정집도 많고 여관도 ,관사도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계실 만한 곳은 구유밖에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지금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세상 권력과, 돈과, 명예를 의지하며 세상의 화려함을 좇아 살았다. 헤롯 같은 권세 있는 왕을 그 시대의 지배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힘을 가진 헤롯이 다스리는 유대 땅에 그리스도가 나신 것은 헤롯왕 위에 더 큰 지배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헤롯은 자기의 권력과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하여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전부 죽였지만 예수님은 벌써 애굽으로 피난하고 난 다음이었다. 세상의 권세, 무력 또한 인간이 만든 제도로 인간세계를 지배해 보려 하지만 세상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을 통치하는 절대 힘은 하나님 손 안에 있는 심판의 권세이다. 인간의 정신세계의 절대적인 힘도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사랑의 힘이 인간마음의 세계를 지배하게 될 때 세상에는 평화가 정착된다. 동방박사들은 이 모든 착각하는 사람들을 헤치며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들은 끝내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곳을 찾아내 그리스도께 경배했다. 그리스도가 어디 계신가? 우리 집에 계신가? 나와 함께 하시는가? 확인하여 그가 계신 곳을 찾으라. 이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가만히 주님을 불러봅니다. 세상의 소리에, 세상풍파에 흔들리지 않게 저희 심령에, 가정에, 이 민족에게 찾아와 주셔서 저희를 다스려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준연목사 / 고평교회


화-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자.
본문: 요 1:9~14
찬송가: 117장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께 거역하여 불순종하는 인간의 행위는 지금도 더 강도 높게 계속되어 구원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멸망에 이르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몰라 보거나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종하고 핍박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구세주로 믿고 마음속에 모셔 도리를 아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세상 죄를 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증언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던 로마 백부장은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자국 등 상처를 본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로소이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 누구도 예외 없이 그분이 이 세상에 탄생하시는 성탄절에 지금 내 마음 속에 다시 태어나시기를 기다리며 모셔야 한다. 성탄절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과 행동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하심을 깨닫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우리의 착한 행위나 정의로움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구원 얻어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성탄절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 외아들까지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알려 주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탄생 시키실 때 천군과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움, 전쟁, 시기, 질투, 살인 등 평화와 평안을 해치는 일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실천하여 이 땅(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신 곳)에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경쟁자를 위해 기도하며 원수를 용서하며 서로 형제, 자매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노력하며 성탄절을 지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완전하지 못하고 악하고 죄가 많은 사람들이며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며 정죄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서로 이해하며 사랑해야 한다. 메리크리스마스!
 
<오늘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죄 많은 저희를 위하여 구원해 주실 예수님을 보내어 주심과 화목하며 평화롭게 서로 용서하고 살 수 있도록 평화의 복을 주셨음을 깨닫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아멘.

김종용목사 / 신도교회


수-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본문: 창세기 5:21~24 
찬송가 : 430장
 
인생은 평범한 날로 이어지고 평범한 날로 쌓이며 평범한 날로 채워진다. 그렇다면 평범한 날을 영적으로 승리하며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에녹의 삶을 통해 살펴보자.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의 계보를 요약하면 "낳고…죽었더라"이다. 그런데 7대 손인 에녹에 이르러서, 두 가지 특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첫째, 하나님과 동행했음을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은 두 사람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바로 에녹과 노아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도 차이가 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할만한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 하나님이 그를 친히 찾아오셔서 말씀하였으며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다. 그의 가족을 살리신 후 그들을 통해 인류를 위해 일하게 하셨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에녹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 외에는 자녀를 낳았다는 것밖에 없다. 이것은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는 뜻이다. 그러한 날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보람된 날로, 승리하는 날로 바꾸었다는 것이 위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천하는 영광을 안겨주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데려가셨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히11:5)"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 두 사람만 죽지 않고 승천했다. 그 하나가 에녹이고 다른 한명은 엘리야다. 둘 다 똑같이 승천한 사람이지만, 그들의 삶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엘리야의 삶은 굉장히 화려했다. 한마디로 드라마틱한 인생이다. 그러나 에녹은 평범한 인생이었다. 평범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고 승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에녹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배워야 한다. 에녹은 3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한 두 유형을 보여 준다.
 
첫 번째 유형은 요셉이다. 창세기 39장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에녹과 노아이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요셉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고 요셉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그를 떠나시지 않은 것이고, 에녹의 경우는 에녹 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닐기를 힘쓴 것이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살았고, 성령을 따라 살았다. 우리도 에녹처럼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매일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자.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자.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과 노아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종찬목사 / 수원성북교회


목-감사의 힘
본문-살전 5:18
찬송: 569장
 
세상을 사는 사람 누구나 원하는 게 있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 행복의 조건이 소유에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아무 꺼리낌없이 자연스럽게 명예, 권력, 지식, 정보, 물질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욕심을 부린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행복지수를 조사해봤더니 잘 발달된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보다 남태평양에 있는 최빈국의 비누아트라는 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도가 더 높았다. 이것은 세상이 주장하는 지식, 정보, 명예 물질의 힘에 의해 행복이 결정되는 게 사실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참된 행복을 원한다면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곳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논리와 다르다. 아니 반대이다. 하나님께선 세상과는 달리 욕심이 도리어 죄를 짓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힘이 다른 것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감사이다. 감사는 우리의 빡빡한 삶을 행복하게 하는 은혜이며 축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다. 감사에는 힘이 있다. 이 힘은 세상이 말하는 어떤 힘보다도 더 강력한 힘이다.
 
감사에는 미움과 분노를 소멸시키는 힘이 있다. 추수철이 되자 나그네살이를 하던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나발의 가정에 도움울 청했다. 다윗의 도움은 마땅한 요구였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을 모욕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분노했다. 그를 따르는 4백 명을 데리고 나발을 집을 멸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윗의 분노를 소멸시킨 사람이 있었다.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다.아바가일은 나발과 달리 감사로 다윗에게 나아갔다. 그녀의 감사가 자기 가정에 임한 다윗의 미움과 분노를 그치게 했다.
 
감사에는 또한 칭찬과 축복을 가져오는 힘이 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이런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주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흔한 감람유도 바르지 않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이런사실을 주님은 감사가 없는 모습이라고 가르치셨다. 여기에 비해 마리아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그 머리털로 발을 닦고 순전한 나드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다. 주님에 대한 이런 마리아의 행동은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 퍼졌다.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시고 축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날마다 매순간마다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가 있다. 감사이다. 누구든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깨달으면 하나님이 주신 그 큰 은혜에 감사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감사없는 마음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된다.
 
이처럼 감사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놀라운 힘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턴 교회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이 감사의 힘을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불평과 불만 원망과 투정에 익숙한 내 입술과 마음을 말씀으로 씻어주옵소서 이제부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과 입술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경근목사 / 행복한교회


금-성탄절의 두 번째 촛불이 켜지다-돌이킴
본문: 눅 2:28-32
찬송가: 104장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흔히 상당수의 남자 운전자들은 자기 고집을 피우고 계속 길을 찾아 나선다. 길을 잃어도 결코 다른 이에게 도움을 구하는 법이 없다. 결국 먼 길을 물어 되돌아 가는 경우가 생긴다.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잘못 나아갔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다. 결국 노아시대에 물로 죄악을 정리하시고자 온 지면을 쓸어버리셨다. 그래서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을 짧게 만드셨다. 하지만 노아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DNA는 이미 부패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점점 더 멀리 나갔다. 죄악이 삶이 되어 버린 것이다.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본성적 죄(sin)와 결과로의 죄들(sins)이 있고 의도적인 죄와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들이 있다. 삶의 모든 분야의 죄악이 만연되어 버린 것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하였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구약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그 잘못된 길을 돌이키게 하려 했으나 마침내 그 간격은 너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스스로 돌이키기에 너무 멀어진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하신다. 기다리지 않고 다가오시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의미가 여기에 있다.
 
대강절에 우리는 이 절박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요 돌이킴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죄를 청산하는 것이다. 자신의 초라함을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마음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회개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는 나함(후회하다), 슈브(깨뜨리다),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유턴하다)등이 있다. 빨리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뜨리고 돌이켜야 한다.
 
죄는 현재의 즐거움을 공급하지만 미래의 공허함을 주고 죄는 육체의 만족을 공급하지만 영혼의 파괴를 선물한다. 그래서 이 절박함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탄절은 돌이킴의 절기이다.
 
그럼 언제 돌이키게 되는 것일까? 누가복음 2장 30절에 보면 시므온의 고백이 나온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내 눈이 주의 구원을 주목할때이다."
 
성탄절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는 절기이며,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절기이다. 일년동안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펼쳐주신 새해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자. 그리고 주님께 돌아가자.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2012년 한해 주님을 멀리 떠났던 모든 죄를 자복합니다. 이제 찾아오신 주님에게로 다시 우리의 마음을 돌립니다. 저희를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내 눈을 열어 예비된 은총을 고대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영익목사 / 성문교회


토-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본문: 롬 12:14~18
찬송가: 408장
 
오늘날 대부분의 인생을 보면,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이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들이 내면의 아픔을 잘 알아볼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지킬과 하이드의 두 양면을 가진 자처럼 때로는 선하고 착한 모습을 보이고, 때로는 분노하고 슬퍼하면서도 겉으로는 가면을 쓴다. 이 가면을 벗고 치유 받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랑이다. 참 사랑만이 우리의 숨겨진 가면을 벗고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참 사랑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다. 이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입맞춤으로, 이 보혈의 은혜로 우리 죄와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 즉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 받고 씻음 받아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은 어떤 삶일까?
 
첫째,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이다. 오늘날 여러분은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선한 사람이 많다고 보는가, 악한 사람이 많다고 보는가? 이는 보는 사람의 생각과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며, 성령의 역사도 있고 마귀의 역사도 있다. 선한 사람도 많고 악한 사람도 많다. 문제는 내 마음의 관점이다. 내 마음이 선한 마음으로 가득 하면 선한 것이 더 많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과 같은 선한 마음을 가질 때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둘째, 항상 축복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했다. 과연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의 감정 중에서도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감정이 미움이라고 한다. 미움의 감정을 해결하려면 다른 해결의 방법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성령의 감동이 임할 때,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됨으로 먼저는 내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이 치유될 것이고, 그 후로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내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길이요, 모두 함께 화복하고 행복해지는 길이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말씀을 명심하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처럼 우리 모두도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입맞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면서 우리 내면의 가면을 벗고 진심으로 사랑을 회복하여 모든 사람과 화목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내면 속에 숨겨진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되게 하소서. 서로를 축복하고 사랑하며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한 인생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식목사 / 가나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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