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극단 '휠'의 특별한 '빈 방'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장애인 극단 '휠'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2월 05일(수) 10:57

[최종률 장로의 빈 방 이야기]

며칠 전에 극단 '휠'의 대표로부터 정기공연 일정 공지와 함께 참석해주면 고맙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오랜만의 소식이 반가웠지만 주안교회 성극팀 '유리바다'의 '가마솥에 누룽지'와 '증언'의 '빈 방 있습니까' 연습이 겹쳐서 시간을 낼 수 없는 것이 미안했지만, 여건이 어려울 것이 뻔한데도 여전히 공연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들의 끈기와 열정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들과 처음 만났던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덕분에 모처럼 '빈 방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2008년 늦가을, 교회 카페인 에쯔로 두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지체장애인들을 중심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극단 '휠'의 대표와 연출자였다. 성탄절기에 '빈 방 있습니까'를 공연하고 싶다며 허락을 받으러 왔노라고 했다. 본인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극단 대표와 비장애인인 연출가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바로 알 수 있었다.
 
과거 극단 '증언'에서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던 고 백원욱 시인의 감동적인 사연을 극화하여 공연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실제 장애인들이 공연의 주체가 되어 정신지체아 덕구의 빈 방을 만들겠다니 의미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연극이 본질적으로 허구에서 출발하는 예술이지만 그들의 장애는 엄연한 현실이고, 그런 뜻에서 장애인들이 장애인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직접 제작하는 것은 그 예술행위의 진정성이 이미 확보되어 있는 셈이었다. 기꺼이 대본을 내어주면서 몇 마디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다. 왜냐하면 지체장애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만드는 공연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캐릭터 설정이나 장면 구성에 있어서 수정작업이 불가피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어줍지 않게 개입하는 것은 그들만의 진솔한 무대를 만드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어서 그 후 신경을 끊었다.
 
'증언'의 '빈 방' 공연이 끝나고 연말께에 '휠'로부터 연락이 왔다. 공연장은 남산 국립극장의 소극장 무대였다.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혹시 객석이 비어 그들의 고통스러운 노력이 위로받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며. 그런데 극장에 도착해 보니 웬걸, 로비에서부터 벌써 활기를 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행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친지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객석은 빈자리 없이 채워져 있었다. 언제나 만석은 연극인들에게 정신적 포만감을 느끼게 한다. 그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객석 곳곳에 휠체어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앞무대 한쪽 구석에도 휠체어를 탄 해설자가 미리 등장해 있었다. 극단 이름 '휠'의 의미가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기획자의 인사가 있은 후 개막음악과 함께 극단 '휠'의 특별한 '빈 방 있습니까'가 시작되었다. 다소 뻑뻑하던 무대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안정되어 갔고 장애인 배우들과 비장애인 배우들이 힘들게 조화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불편한 워킹과 익숙하지 않은 표정연기가 위태롭게 이어졌지만 은연 중에 그들의 삶의 고뇌가 배어나오는 연기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관객의 마음 저 아래 심연으로 나지막한 감동의 울림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객석에는 조용한 흐느낌이 번졌다. 이윽고 공연이 끝나고 무대 인사가 이어지자 관객들은 뜨거운 함성과 박수로 참고 있었던 감동의 봇물을 터뜨렸다. 그것은 무대미술의 조악함과 연기술의 미숙함을 불식시킨, 진정성이 녹아든 그들만의 공연에 대한 찬사였다! 그것이야말로 러시아의 전설적인 배우 겸 연출가였던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역설한 바 '극예술의 진실'에 다름 아니다. 문득 매너리즘의 빠져있는 '증언'의 '빈 방'이 부끄러워졌다.
 
맑은 겨울 하늘 아래 정화된 마음으로 국립극장 언덕을 내려오며 새삼 연극하는 보람에 행복할 수 있었다.

최종률장로/연극연출가ㆍ배우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