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영성

[ 예화사전 ] 비움의 영성

이성희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1월 23일(금) 11:10

[예화사전]

여러 해 전 교회 행사로 모두가 분주한 오후였다. 모두들 자신의 맡은 일을 하기 위해 일손이 모자랐다. 자리를 정돈하기도 하고, 강단을 장식하기도 하고, 의자를 옮기기도 하고,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일을 지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잠시 보고 격려한 다음 나는 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어느 집사님이 방으로 나를 만나겠다고 들어오셨다. 첫눈에 그 분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얼굴이 온통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표정도 일그러져 있었다. 한 눈에 화가 난 표정을 발견한 나는 집사님을 의자에 앉게 하였다. 화가 난 사람에게 "왜 화가 나셨습니까?"라고 한다면 화가 더 치밀어오를 것 같아 잠시 시간을 벌기로 했다. 차를 한 잔 마시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업은 잘 되십니까?", "아이들은 다 공부 잘 하지요?" 등 그 분이 나를 찾아온 핵심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분의 화를 약간 가라앉히기 위한 작전에 불과하였다.

차를 다 마신 다음, 나는 집사님에게 물었다. "그런데 집사님, 어떻게 오셨어요?" 화가 나서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파 온 것을 알면서도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 때 집사님은 "목사님, 교회 일 하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못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 나는 무엇 때문에 자존심이 그렇게 상했는지 묻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집사님, 교회 오실 때는 자존심은 집에 두고 오는 겁니다". 집사님은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생각하더니 "목사님, 잘 알았습니다"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셨다. 더 이상의 긴 이야기도, 설명도 원하지 않았고 필요로 하지 않았다. 비우지 못하고 채워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것이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는 모름지기 자신을 비워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지 않으셨더라면 절대로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자신을 비우지 않으셨더라면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매를 맞고,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는 구세주로서의 그 일을 절대로 하시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처럼 우리도 비우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나로 가득 채우면 주님의 일이 될 수 없다. 두레박에 우물을 길으려면 비운만큼 채워진다. 빈 두레박에 물은 가장 많이 찬다. 비움(emptying)은 채움(filling)의 전제 조건이다.


이성희목사 /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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