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조촐했던 결혼식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조용하고 조촐했던 결혼식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1월 14일(수) 11:18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새봄이 시작되는 3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결혼식 전날까지 학교에 출근해서 여느 때처럼 일했다. 학교에는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알리지 않았다. 다만 이사장님과 고등학교의 박 교장 선생님, 이렇게 딱 두 분에게만 결혼식 날짜를 알려드리며 초청했다. 그 외에 몇몇 친구들과 주선애선생님을 결혼식에 초청했다. 임 목사님도 담임으로 교역하셨던 도원동교회에 알리지 않았고 그저 황광은목사님과 가까운 친구 몇 분을 초대했다. 다만 목사님의 가족과 친지가 많아서 이분들이 대거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친 형님의 가족은 육촌 형님의 가족과 조카들을 모두 합치면 수 십 명이나 되었다. 반면 나는 남한에는 친척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울 시내 어느 호텔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주례를 김용진목사님이 맡아 주셨다. 고 김이태교수(장신대 조직신학)의 아버지이신 김 목사님은 임 목사님과 같은 고향 분이셨고 평소에 임 목사님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셨다. 그 당시에는 결혼 휴가 기간이 무척 짧았는데 딱 일주일이었다. 나는 이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결혼식을 왜 그렇게 콩 볶듯이 급하게 진행해야 하는지 못마땅했다. 아무튼 휴가를 마치고 나서 임 목사님은 다시 미국 시카고의 목회 현장으로 돌아가셨다. 결혼식을 올린 지 몇 달이 지난 후에 임옥 목사님이이 서울 영암교회로 부임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정확하게 1970년 7월 15일이었는데 영암교회를 담임하시던 황광은목사님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우리의 결혼식에 참석하셨던 황 목사님은 남편 임 목사님과 아주 가까운 친구였고 나이는 목사님보다 몇 살 아래였다. 그런데 황 목사님은 별세하기 여러 달 전부터 자신의 건강 상태가 날로 악화된다는 점을 아셨다. 그래서 임 목사님께 편지글로, "형님, 아무래도 제가 영암교회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을 것 같으니 형님이 미국에서 나오셔서 이 영암교회를 좀 맡아 주십시오. 저는 자유롭게 이 교회를 떠나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그 편지를 임 목사님이 고이 간직하고 계셨다. 그 편지를 쓰고 나서 두 달 후에 황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간경화가 심해져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들었다. 그분의 부고를 들은 나는 문상을 갔는데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자동차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담임 목사님의 부재로 말미암아 교회가 어려워지자 장로님들이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생전에 황 목사님이 당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후임으로는 미국에 계시는 임옥 목사님이 오시면 좋겠다"고 하셨기에 장로님들이 이 말씀을 황 목사님의 유언으로 받아 들여서 그렇게 추진하기로 했다. 교인들도 거기에 순종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그러고 나서 영암교회 당회가 미국에 계시는 임 목사님께 연락해 담임 목사로 청빙했고, 당회 회원들이 나를 만나러 정신여고로 찾아왔다. 나는 일단 "목회야 목사님이 아시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미국에 계신 임 목사님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 오셨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이 한국으로 귀국해 목회하실 뜻이 있다면 이번 일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본다고 대답했다. 임 목사님이 여러 달 기도하시는 가운데 깊이 생각한 끝에 귀국하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임옥목사님이 영암교회로 부임하면서부터 우리는 부부의 도리를 다하며 살게 되었다. 임 목사님은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다. 항상 자신의 생각을 절제해서 표현했기에 말수가 적고 과묵한 분으로 속마음에는 언제나 따스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1ㆍ4 후퇴 때 목사님이 북한 땅인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넘어 오신 이래로 혼자 사셨기에 그 생활이 상당히 몸에 배어 있었다. 목사님은 이른 새벽의 기도회 인도로부터 늦은 밤까지 전심전력 목회에 열중하셨다. 나는 정신여자중학교의 교장으로서 그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느라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였으므로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해 늘 아쉬웠다. 더욱이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은퇴하시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셨는데 내가 그분의 후임으로 고등학교 교장이 되면서부터 훨씬 더 바빠졌다. 내 몸이 바빠짐에 따라 내 마음의 짐은 갈수록 더 무거워졌다. 다름이 아니라 목사의 아내가 된 내가 남편의 목회를 잘 돕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늘 마음에 걸린 것이다.

 
이연옥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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