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적 책임

[ 논단 ] 교회의 정치적 책임

김명용총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0월 26일(금) 14:07

[주간논단]

우리는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예배당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좌우 대립이 격해지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같은 교회 안에서도 같은 설교를 해도 1부 예배 때의 성도들의 반응과 4부 예배 때의 성도들의 반응은 상당히 다르다. 특히 정치적 사안에 대해 설교할 때는 더욱 심하게 차이가 난다. 1부 예배 때 큰 은혜가 되었다는 설교가 4부 예배 때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목사님 설교에 실망했다'며 교회를 떠나는 성도도 상당히 많이 있다. 이는 많은 교회에서 나타나는 오늘의 교회의 위기적 상황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곤경 속에서 나온 매우 기발한 말이 위에 언급한 우리는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예배당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예배당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의 뜻은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당'이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당이지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다. 교회 안에서 여당 선전이나 야당 선전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회는 예수당'이라는 말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예수당이라는 말은 철저히 맞는 말이지만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예배당이라는 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수당은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당이 예배당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당이 사회로 나오면 무언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한다. 정치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어떤 정치적인 결단을 해야 한다. 예수당은 사회 속에서, 그리고 정치적 영역에서 어떤 길을 가야 할까?
 
교회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이 세계의 신학계의 일치된 견해이다. 정치적 중립론도 잘못되었다고 거의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중립이란 세상을 마귀에게 넘겨주는 크나큰 오류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치를 변화시켜서 정치적 영역 속에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게 해야 한다. 특히 칼빈주의 신학은 정치적 책임에 매우 민감한 신학이었다. 칼빈은 제네바를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성시로 만들고자 했던 의지를 가지 사람이었다. 아브라함 카위퍼은 하나님의 주권이 네덜란드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 구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반혁명당을 이끄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마침내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공동체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면 이를 위한 구체적 정치적 방안과 도구가 필요하다.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예배당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여당이 아니고 야당이 아니더라도 예수당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유럽에서 발전된 정치신학은 바로 이런 정황 속에서 예수당이 가야 할 길을 찾으려는 신학적 시도였다. 히틀러 시절의 독일 교회의 실패를 역사적 거울로 삼고 폭풍이 몰려오는 역사 속에서 예수당은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정치신학을 탄생시켰다. 이 정치신학은 1980년대에는 평화신학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동서냉전을 끝장내는 위대한 역사에 크게 정신적으로, 신학적으로 공헌을 했다. 독일의 평화통일과 동서냉전의 종식에 정치신학과 평화신학의 공헌은 매우 컸다. 만일 유럽의 교회가 정치신학과 평화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역사는 다른 길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매우 컸다. 교회는 정치신학을 발전시키고 정치신학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정치적 책임의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정치신학 뿐만 아니라 경제신학도 발전시키고 가르쳐야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가 하나님의 경제인지, 오늘날 언급되고 있는 경제 민주화가 하나님의 경제인지 아니면 예수당이 가야할 경제의 제3의 길이 있는지 교회는 연구해서 이를 가르쳐야 한다.


김명용총장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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