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종교개혁 이야기

[ 교계 ] 체코 종교개혁 이야기

이종실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0월 22일(월) 14:29

체코 땅에서 종교개혁의 첫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그리고 좌절의 피눈물이 강이 되어 흘렀던 프라하에서 나는 역사를 새롭게 배운다. 프라하는 "역사는 승자의 것"이 아니라 "역사의 물꼬를 트는 자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프라하는 이름없는 희생이 요구되는 선구자가 되기보다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예측 가능한 길을 선택하는 삶의 습관을 부끄럽게 만든다. 프라하는 복잡한 이데올로기 논쟁과 진영싸움, 주도권 다툼의 계산된 정치행위를 비웃는다. 프라하의 종교개혁자들의 역사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 12:9)는 사도 바울의 고백의 역사이다.
 
프라하 종교개혁은 성공한 종교개혁을 먼저 꿈꾸고 계획한 후 시작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현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복음의 진리에 복종하는 대안적 실천을 시도한 것 뿐이다. 좌면우고(左顧右眄)하지 않았다. 정치세력의 결탁을 계획한 것도 아니다. 얀 밀리취(Jan Milic)라는 일리교회 사제 한 사람의 목회적 고민만이 있었을 뿐이다. 자신의 교회에 출석하는 젊은 여성들 가운데 매춘녀들이있었다. 그들은 교회를 찾을때 마다 같은 내용의 고해성사를 반복적으로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별로 교회에 도움이 되지않는 부류의 교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제는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여 그들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계층이어서 라틴어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거룩한 언어인 라틴어를 예배와 성경의 언어로 사용했다. 라틴어를 모르는 계층은 아무리 성수주일을 하여도 복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 예배를 출석하고, 설교를 들어도 그들에게 복음은 전달되지 않았다. 복음이 전달되지 않으니 매춘여성 교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얀 밀리취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여성 교인들을 수용하고 하루에 아홉번씩 미사를 드렸다. 아홉번의 미사 모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체코어로 진행되었다. 체코어로 설교를 듣고 쪽복음처럼 그들에게 필요한 성경구절들이 체코어로 번역되어 읽혀졌다. 드디어 복음이 그들의 귀에 전달되었고,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얀 밀리취는 이 사건을 경험한 후 체코어로 설교를 하는 채플을 건축하였다. 이 교회당이 체코 종교개혁의 상징이며 심장인 '베들레헴 채플'이다.
 
이 채플에서 체코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인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설교를 했다. 그리고 채플실 건물에 후스가 거주했던 너무나도 소박한 방이 있다. 지금 이 방은 후스 종교개혁의 역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이 채플에서 설교하면서 마태복음 9장 36~38절의 말씀을 인용해 "인간구원을 위해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신실한 설교자가 적다."(후스의 설교에서 인용)고 현실 교회를 비판하였다. 아마 얀 후스가 마태복음 9장 36~38절을 선택한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의 교인들을 그렇게 불쌍히 여겼다.
 
체코 종교개혁은 개혁의 성공을 위해 앞뒤 계산을 한 뒤에 시작한 일이 아니다. 복음의 진리에 양심이 찔린 목회자가 복음의 음성에 순종하고 대안적 실천을 시작한것 뿐이다. 바로 이것이 약 1백년 후 루터(편집자주:루터는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르텐베르그성의 교회 문에 붙인다)와 칼빈(편집자주:칼빈은 1536년 제네바에 체류하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제네바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다)에게로 이어져서 오늘날 개신교회의 전통인 "모국어로 예배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설교하는 전통"이 되는 놀라운 역사로 발전된 것이다.
 
체코 종교개혁 교도들은 1420년 7월 14일 까롤리눔에서 소위 '프라하 4개 조항'으로 불리는 네개의 개혁 프로그램을 주장하였다. 그 프로그램은 복음의 진리와 멀어진 기존의 주류 전통 기득권 교회들의 부패를 회개하는 대안적 실천사항이며 개혁파들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프라하 4개 조항'은 첫째, 예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설교해야 하고, 둘째, 성만찬은 예수님처럼 떡과 잔으로 시행하는 이종성찬이되어야 하며,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청빈한 삶이 있어야 하며, 넷째, 사제들의 면책특권을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15세기 체코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프라하 성에 있는 비트 교회당 외에 프라하 시내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개혁파 교회들이 되었고, 심지어 가톨릭 교회는 사제 서품을 할 수 있는 사제가 없을 정도였다.
 
체코 종교개혁 이후 1백년 뒤 서유럽에서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약소민족이었던 체코 개혁교도들의 신앙고백은 합스부르크 왕국의 탄압을 받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체코 개혁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일어난 30년 전쟁은 체코 개혁교도들의 박해의 빌미가 되었다. 그 역사를 지금 프라하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된 27명의 개혁교도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시청 앞 27개의 십자가 표시와 시청 벽면의 명단 동판만이 말없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처형자들의 잘린 목을 감미로운 곡조를 만들며 흐르는 블타바 강의 까렐교(Charles Bridge) 교각위에 10여 년 간 걸어둬 반가톨릭 운동 세력에게 경고로 삼았다. 재카톨릭화는 신속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조는 권력의 힘으로 개혁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지만 지우려고 했던 그 흔적이 오히려 "주님의 진리는 승리한다."(Pravda Pana vitezstvi)는 개혁자들의 구호를 더욱 생생하게 웅변하고 있다.

 
이종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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