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광야영성”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젊은이를 위한 팡세

김권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0월 08일(월) 14:53

 "바람직한 광야영성,
 고독과 성도의 교제가
 서로 조화 소통하는 것
   ㆍ
 낭만을 가장한 고독,
 죽음에 이르는 병"
 빈마음, 진리로 채워야

헤겔은 <법철학>에서 선각자의 지혜를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땅거미가 드리워 질 때가 되어서야 웅비하기 시작한다는 말을 했다. 혹자는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미네르바의 부엉이로 비유하면서 앞서가는 자신의 뛰어난 철학을 남들이 이해하지 못함을 의도한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은 고독하기 쉽다고 헤겔은 해석했던가 보다. 물론 선각자만 고독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고독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고독은 미네르바의 부엉이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선각자들도 경험해야 했다. 본래 기독교의 '광야영성'은 고독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독의 훈련코스를 이수하지 않은 사람 치고 믿음의 대열에 합류한 사람을 찾을 수 없다. 고독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정도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도 인간의 옷을 입으셨을 때의 공생애는 40일 광야 생활로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사람은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로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진리가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부정할 수 없는 게 인간실존이다. 최근 모 의대 연구팀이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흉악한 상습 미성년자 성폭행범들은 고독감을 느끼는 정도가 일반인보다 4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사회성 지수는 일반 범죄자보다도 33%가량 낮다고 한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없는 이들은 주변에 교류할 사람도 없게 되었고, 그러면서 고독을 빌미로 접근한 불행의 세력에게 삼키움을 당하게 된 경우이다. 
 
그러나 '더불어 살아가는 삶'과 '광야영성'의 경계선이란 측면에서 볼 때 그런 식의 고독은 엄밀히 말해 고립이다. 고독과 고립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흔히들 고립이 내면의 공허 상태라면 고독은 내면의 충만 상태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다면, 공동묘지의 빈 무덤 같은 고립이 아니라 야생초 같은 고독과 성도의 교제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소통하는 것이 바로 광야영성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홀로 계시는 시간과 무리들과 함께 하시는 시간이 서로를 위한 소통이었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유행하는 '낭만을 가장한 고독을 위한 고독'은 건강한 고독이 아니라 게으름이요 나태함이며 직무유기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광야영성에서 말하는 고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기에 마음을 비워야 하지만은 빈 마음을 진리로 채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빈 마음에 정체성을 삼키는 귀신이 들어온다. 이처럼 광야영성은 고독을 동반하지만은 그 고독은 진리와 함께 하는 고독이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적 공허로 나타나는 쭉정이 고독이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충만하고 은혜로운 고독, 축복으로서의 고독을 이야기했는데,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선택한 광야영성의 고독이라면 분명히 미네르바의 부엉이도 부러워하는 고독이랄 수 있다.

김권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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