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8~13일

[ 가정예배 ] 10.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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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05일(금) 09:49

월 - 기도향기
본문:  고후 2:14-15
찬송가 : 361장
 
꽃에는 꽃의 냄새가 있다. 백합의 향기가 있고,장미의 향기가 있다. 냄새는 좋은 냄새도 있고 역겨운 냄새도 있다. 냄새는 냄새를 풍기는 그 자체의 존재를 의식한다. 성도에게서도 냄새가 난다.
 
본문 말씀에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4)…"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그것을 그리스도의 향기라 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얼마나 귀한가?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는 것, 이것은 최고의 축복이요, 칭찬이다. 그래서 그 냄새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이다. 성도에게서 맡을 수 있는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그리스도의 향기는 기도향기이다. 이것은 사람의 코끝에 느껴지는 냄새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으시는 좋은 냄새이다.
 
기도할 때 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물씬 풍기는 것이다. 성도에게서는 기도냄새가 물씬나야 한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한다. 또 금대접에 담았다고 한다. 금대접에는 오직 귀한 것을 담는다. 성도들의 기도는 너무나 귀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금향로에 담게 하는 것이다.
 
기도 이상 고귀한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기도를 너무나 귀하게 향기로 받으신다. 기도하는 가정일 때 향기나는 가족이 될 것이다. 솔로몬의 부귀가 어디서 왔는가?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대하 1:11) 솔로몬의 기도 향기가 하나님 보좌를 적시고 솔로몬은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
 
우리 가정은 어떤 냄새가 날까?
 
술 먹는 사람에게선 술 냄새가 나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겐 담배 냄새가 나는데, 우리 성도들에게서 기도향기가 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꽃과 같이 본래 지닌 향기가 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그 냄새가 달라지기도 한다.
 
페르시아 우화에 이런 얘기가 있다. 한 여행자가 향기 나는 진흙을 발견한다. 여행자는 진흙에게 물었다. "향기 나는 진흙이라니!, 너는 바그다드의 진주냐? 인도의 사향이냐? 어디서 너의 향기가 나오는 것이냐?" 그러자 진흙이 답했다. "아닙니다. 나는 오랬동안 백합화가 내 진흙에서 피어났을 뿐입니다."
 
기도를 하면 그리스도 향기가 풍겨서 하나님께 향기로 올리워진다. 온 가족이 기도향기를 날리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은혜의 향기이신 주님, 우리 온 가족이 기도의 향기를 주님의 금대접에 가득 채우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동석목사 / 감동교회


화 - 텅빈 충만
본문 : 사도행전 3:1-10
찬송가 : 183장
 
법정 스님이 수필 형식으로 쓴 '텅빈 충만'이라는 책이 있다. '텅빈'과 '충만'이라는 상반되는 단어에서 받은 감동의 여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노자는 "항아리를 쓸모 있게 하는 것은 도공이 빚은 흙이 아니라 항아리안의 빈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항아리가 쓸모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미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 항아리는 아무리 다른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채울 수가 없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 충만'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 성령이 충만한 것이란 어떤 상태일까? 성령 충만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내 속에 충만하다는 것은 몇 가지 은사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경험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정신과 가치가 내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나를 비우는 '텅 빈'의 작업입니다. 내 삶의 영역을 채우고 있는 세상의 욕심과 욕망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마가 다락방 사건은 '텅빈 충만'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성도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의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금과 은, 그리고 명예와 권력으로 채우고자 했던 욕심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내 욕심을 비우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를 통해 자신들의 마음의 항아리에 가득 채워져 있던 욕심들을 끄집어내어 마음의 항아리를 비울 때 바로 그곳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빈 공간을 충만하게 채우셨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회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텅빈'상태로 만들고 그 곳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채웠을 때 일어난 놀라운 일이다. 베드로는 동전 한 푼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내가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했다. 세상의 것을 채움으로 행복을 추구하던 베드로가 성령님 안에서 변화된 후에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선포는 자신의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포이다. 자신을 비우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선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우리의 욕심으로부터 나를 비우는 훈련을 쌓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내가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는 베드로와 같은 영적인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내 욕심를 채우는 도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도리어 나의 욕심을 비우고 그 곳에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진규목사 / 행복한교회


수 - 예배는 왜 드립니까?
본문 : 눅19:10
찬송가 : 521장
 
"예배를 왜 드릴까?" 이 질문에 정의를 바르게 내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배는 생명이다. 예배가 최고이다. 이것을 모르면 예배가 지루하고 답답하며 졸립다. 우리나라가 지난 런던 올림픽 축구 동메달을 획득했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서에 병역혜택이라는 동기부여가 많이 작용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심각하게 던져 보아야 할 질문이 있습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왜 드리는 것일까? 이것을 알아야 은혜가 되고 복이 된다. 한 마디로 결론은 구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왜 이 땅에 보내셨는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예배는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의 행위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누가복음 19장 8절을 보면 구원 받은 자의 흥미로운 예배의 모습이 나온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배는 이처럼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의 행위이다. 그래서 예배는 사실 어찌 보면 참 단순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와 감격하며 드리는 응답의 행위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구원에 대한 최초의 반응이 바로 예배이다. 즉 구원받은 은총은 예배의 근원이다.
 
19세기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탄광촌을 방문했다. 책임자에게 구원에 관하여 설명하자 책임자는 "구원이 너무 싸군요.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니 값이 너무 싸단 말입니다. 뭔가 값이 좀 들어가야 할 것 같군요"라고 했다. 무디는 다시 "당신 오늘 갱에 들어갔었나요? 얼마나 깊이 내려갔었지요? 수백 피트나 되지요. 어떻게 내려갔습니까?"라고 묻자, 책임자는 "그것은 간단하지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무디가 다시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라고 묻고 책임자는 "석탄회사에서 이미 많은 돈을 들여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으니 저는 그저 그 엘리베이터를 타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바로 그겁니다. 선생이 엘리베이터를 타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그 공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십자가의 엘리베이터를 놓으셨으니 믿음의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이 마땅히 예배해야 함을 알았사오니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이지 않고 감동과 감격이 있는 예배되게 하옵소서. 예배의 목적과 동기를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종래목사 / 새로핌교회


목 - 눅 23:33-38
제목 : 예수님처럼 용서하라
찬송가 : 187장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아 죽이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는 용서의 선언이요, 사랑의 대헌장이요, 완성이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서받아야 할 죄와 허물을 사함받고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란다. 또한 용서할 사람들을 용서하므로써 잃어버렸던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하게 용서하셨다.
 
"허물을 사유하시며"라고 했다(미 7:18-19). 이 말은 '넘긴다, 덮는다, 씻는다, 희게 한다, 대신한다, 기억도 안 한다, 넘어간다'는 뜻이다. 그동안 내가 저지른 죄, 내 행동, 내 삶을 하나님이 넘겨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 설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용서를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받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이집트의 총리가 된다. 후에 양식을 사러 애굽에 온 형제들 만났을 때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의 눈이 있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 용서치 못할 사람이 없다. 하나님을 못 보기때문에 자꾸 사람을 보게 되고, 사람이 원망스럽고 미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뜻 없이 나에게 그런 어려운 일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 행동자체는 밉지만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향해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용서는 나의 선택이 아니다. 주님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용서에는 조건이 없다.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용서는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 내 마음이 사랑으로 넘쳐나야 한다. 용서가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사랑할 수 있어야 용서가 된다. 사랑만이 모든 원한을 풀게 하고 사랑만이 분노를 없앤다. 내 가슴을 사랑으로 가득 채울 때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 누구든지 용서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용서하셨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용서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호경목사 / 흥해중앙교회


금 - 한 백부장의 고백
본문 : 마가복음15:33-39
찬송 : 294장
 
사람들의 죽음의 형태를 보면 다양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죽는 경우, 병들어 죽는 경우, 의로운 일을 위해 죽는 경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경우 등등.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자를 위해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원수를 사랑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온 인류를 위한 죄의 값을 단번에 치루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일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 세상에 알리는 것이 아닐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신다.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을 때에도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들으시면서도 오직 침묵과 온 땅에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둘째는 제자들의 고백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일 것임을 말할 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가 고백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함께 동거동락하던 제자의 고백이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된 것이다
 
셋째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이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형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죄명은  신성모독죄인데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섰을때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마26:63,64)고 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성령께서도 증언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넷째는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이다.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한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받으셨지만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광경을 보면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다. 이방인의 증언이요 십자가형을 집행한 목격자의 증언이다. 진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대속을 이루신 참 메시야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의기도 >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큰 사랑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겸손과 희생으로 구속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을 본받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석근목사 / 평화의교회


토 - 감사,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옵니다
본문 : 누가복음 17:11-19
찬송가 : 429장
 
추수의 계절,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들판에는 한창 추수를 위해 땀 흘리는 분들을 볼 수 있다. 올해는 태풍으로 시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추수하는 분들의 기쁨이 크다. 이러한 추수의 때에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스펄전은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고 하였다. 칼 힐티는 '감사가 곧 행복'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말이다. 2012년을 출발하여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어떤 감사의 제목들이 있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는 10명의 한센병 환자가 등장한다. 당시 율법에서 이들은 병이 발병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형으로 여기며 버림받은 인생으로 살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고, 일체의 신앙생활도 금지당한 채,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가장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인생으로 살아야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그러했다.
 
이렇게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주님 지나가시는 소식을 들었고, 주님께 호소하였다. 최고, 최후의 기회를 맞은 저들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어 도움을 청하자 주님께서 저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가다가 모두 몸이 깨끗하여졌고 나음을 입었다. 모두가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도 각양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는 것, 즉 우리 모두에게 감사거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10명의 환자들 중에서 주님께 나아와 사례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자기의 나음을 보고 즉시 주님께 나아와 엎드려 사례하였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하였다는 것은 최대한의 감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사마리아인이라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을 만나는 것을 주저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이 상황과 환경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나아와 감사했다.
 
오늘 본문의 이 주인공의 감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께서 저를 향하여 "일어나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신다. 그는 보다 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주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주신 것에 적극적으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의 넘치는 은총과 복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감사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길 바란다. 한 가지 일 때문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으로 감사거리를 주시고, 은혜와 복을 더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인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더욱 많은 감사거리를 주시고, 또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믿음은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감사는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는 통로가 된다. 감사로 더 풍성함을 얻는 성도가 되라.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어렵고 힘들었던 것들을 보며 한숨짓는 것에 멈추지 않고 주님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더욱 감사로 채워지게 하소서. 그래서 감사한 것 이상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일목사 / 일동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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