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0~15일

[ 가정예배 ] 9.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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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9월 07일(금) 13:25

[가정예배]

월-영생의 말씀
본문: 요한복음 6:60-71
찬송: 546장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후에 이 기적을 놓고 중요한 말씀을 직접 전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깜짝 놀랄 기적도 행하셨고 높은 권세와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전하셨지만 사람들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하고 다 물러 갔다. 보여주며 전하는 데도 군중들이 다 물러가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어이가 없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고 계신다. 그 때 다행스럽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는 고백을 했다. 내 살을 먹어야 하고 내 피를 마셔야 하며 나를 통하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귀한 말씀을 하셨는데, 군중들은 이해가 안된다며 물러가고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으로 받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들은 잘 살고 병이 낫고 출세하는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주님을 따랐고,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니 서로 맞지 않았다. 우리가 육신적인 것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면, 몸이란 아주 귀한 것이다. 이렇게 귀한 몸이지만 일단 죽으면 영혼없는 몸, 생명없는 몸이 되어 아무 쓸모 없이 땅에 묻어 버린다. 결국 영, 생명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은 실망했고 물러간 것이다.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려지고, 듣고 싶고, 말씀이 즐겁고 감사한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 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드리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놓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이 내가 괜찮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은혜 안에서 영생을 얻은 자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아갈 때 이 땅에서도 영생을 누리며 만족하게 살아갈 수 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한다. 즉 속죄된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화목하고 사랑의 관계인 것이 영생이다. 내가 불붙는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한다 하더라도 믿지 아니하면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도 믿음으로만 알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감격할 수 있고, 그 사랑이 내게 와서 능력으로 나타난다. 믿는 자만이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넘친다. 베드로는 믿었고 알았다.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뿐이어야 한다. 오직 주님만 따라야 하며 말씀으로 만족하고, 말씀의 능력 안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갖춰진 자로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오늘의 기도>
주님, 지극히 세상적이면서도 온갖 세상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저희를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게 불러 주시고 어려운 영생의 말씀을 알아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온갖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원하신 주님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숙재목사 / 대곡교회


화-놀라운 주의 사랑
본문: 요 13:1
찬송가: 251장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하지 않고, 불친절하며, 항상 비판적이고, 험담하며, 다른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말을 들을 때 기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다. 끝까지 사랑하기 보다는 자기유익에 따라 사랑을 중도에 멈추는 일이 다반사인 세상이다.
 
우리 안에 이런 기질은 없는가?
 
가인의 잔혹한 기질, 자연적으로 싫어지는 사람, 너무도 성가셔서 어떤 측면에서 해가 되는 사람을 멀리 피하는 성격, 무관심, 불순종, 세상사랑, 육체의 욕심대로 살기,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놀라운 주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첫째, 십자가에 죽은 사랑이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아무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항한 사랑의 피를 흘려주셨다. 십자가에 죽으셨다. 생명을 주신 사랑이다.
 
둘째, 먼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며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9)."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죄와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먼저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최종적으로 이해된다.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먼저, 육체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을 향한 동정심과 연민의 정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진노 아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첫발자국은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지 못해 미안하고, 먼저 섬기지 못해 미안하고, 나누지 못해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놀라운 주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하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났다. 나는 자연인과 같지 않다. 내게는 그렇게 살아갈 권리가 전혀 없다. 나는 새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 나는 옛것을 벗어버리고 새것을 입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다고 자부하며 성령과 예수그리스도가 나와함께 거하신다고 자부한다. 나는 그 분을 닮아야 한다. 이것은 큰 특권이다."

<오늘의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높여 드립니다. 먼저 사랑해주신 그 은혜에 보답코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저를 보고,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하여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로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광식목사 / 은혜교회


수-네 자신을 시험하라     
본문:고후 13:5-10
찬송가: 212장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마지막으로 주신 교훈이다. 어느 시대 어느 가정에게나 적절한 교훈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 자신을 아는가 시험해 보아야 한다.
 
옛날 동양 성현들의 말씀 중에도 '남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라고 했다. 오일삼성오신 (吾日三省吾身)이란 말도 있다. 하루에 자기 자신을 세 번씩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보는 입장이 세 가지 방면이 있다. 하나는 내가 나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이다. 나는 내 자신을 잘못 보기가 쉽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줄 착각한다. 못생겼는데 잘생긴 줄 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 자신을 더 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의 견해도 잘못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이다. 그러므로 가장 정확하고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반성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보고 회개하는 것은 축복이다.
 
둘째,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가 시험해 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원수에게 패망한 자의 무덤보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스스로 패망한 자의 무덤이 더 많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제어는 어느 방면에서나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우리 자신의 감정을 바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제가 일시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자기 일생의 친구이며 가장 유능한 대장인 크리터스를 죽인 후에 얼마나 탄식하였는지 모른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는 당시에 천하를 정복하였으나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큰 실수를 했다. 인간은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분을 참을 수 있어야 하고 슬픔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성경은 혀를 다스리라고 경고한다.
 
시편 34편 13절에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라고 했다. 잠언 13장 3절에는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고 했다.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라"고 경고했다. 나 자신을 언제나 다스려야 함을 잊지 말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을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게 하옵소서. 나 자신을 보고 회개하고 성령을 통하여 나 자신을 다스리게 하시며 언제나 혀를 조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범석목사 / 온양영은교회


목-이런 사람이 됩시다
본문: 로마서 16:1-2
찬송가: 320장
 
사도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많은 동역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결코 혼자 일하지 않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일은 결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혼자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은 혼자 행복할 수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을 바다 속 고기에 비유해 설명해 보려고 한다.
 
첫째, 상어같은 사람. 바다의 무법자인 상어는 잡식성이어서 뭐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그 날카롭고 안쪽으로 굽은 이빨은 뭐든 한번 물면 놓치는 법이 없고 심지어 같은 상어끼리도 서로 잡아먹는다. 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시험들게 하는 이들이 해당된다.
 
둘째, 돌고래같은 사람. 돌고래는 지능이 매우 높고 유쾌하고 명랑한 물고기이다. 돌고래는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상어의 공격을 피하고 다른 물고기들을 보호해주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면서 우아한 아치 모양을 그리며 점프를 한다. 돌고래는 다른 물고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알며 인간들과도 매우 친숙하다. 교회 내에서도 남을 배려하며 남을 복되게 하는 이들이 많다.
 
셋째, 참치같은 사람. 인간들이 가장 맛있게 먹는 참치는 매우 미련한 물고기로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나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 피가 자신의 피인지도 모르고 근처에 피를 흘리는 먹잇감이 있다고 좋아한다고 한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심도 없고 다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된다.
 
반면, 뵈뵈는 교회 '일꾼'이었다. 원래는 이방인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었다. '일꾼'이라는 말이 원어로는 '디아코노스'로 즉, '먼지를 뒤집어쓰는 자'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집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이 교회를 관리하던 지도자였고 뵈뵈는 그 교회에 임무를 맡고 섬기는 사람이었다. 뵈뵈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인 줄 알고 충성을 다했고 이 교회를 돌보며 관리하던 바울은 그를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뵈뵈는 복음 전도자들의 '자매'였다. 뵈뵈는 바울뿐만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 전도자들에게 자매로 인정받았다. 오늘날도 교회 여자 성도를 '자매님', 남자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님'이라고 하지만 아무나가 아닌 주안에서 한 식구가 되었을 때 형제, 자매이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5)"고 하셨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도 주안에서 '형제''자매'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뵈뵈는 복음 전도자들의 '보호자'였다. 보호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제적이 후원자다.즉 뵈뵈는 바울 선교사역의 재정적인 후원자였다. 우리도 뵈뵈처럼 복음전도자들의 재정적 후원자들이 되어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되자

<오늘의 기도>
우리들을 많은 사람 중에서 부르신 주님. 주신 사명 잘 감당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피 값으로 사신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일에 뵈뵈처럼 일꾼으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장현목사 / 옥포새중앙교회


금-이건 뭐지
누가복음 20:19~26
찬송가 : 325장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것이 자신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을 알고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잡아 오고 싶었던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 한다면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심을 잃을까, 자신들이 비난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하여 그들은 일을 꾸미되 뒤로 숨기로 한다. 로마 제국의 공권력을 힘입어 예수님을 제압할 계책을 세운다. 이들의 사주를 받은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질문한다.
 
이와 같이 간혹 스스로를 의인인체 하며 자신을 보낸 이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인 듯 말한다. 자신들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언제나 진리에 서 있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와 반대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질문과 의도는 다르다. 이들의 관심은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 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은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답변 내용에 따라 순종하며 살려고 질문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이 질문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옳다고 하든 옳지 않다고 하든 이 질문에 답변을 하는 것이다. 어떤 답변이든 예수님이 답을 하는 순간 예수님을 잡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기대와는 다른 답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동전을 누구에게 드리기 전에 그 동전이 누구에게 속해있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전이 가이사에게 속했다면 가이사에게 바칠 것이며, 하나님께 속했다면 하나님께 드릴 일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보고 믿는 바대로 행동한다.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거나,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쳐서는 안된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에는 여리고 성에서 자신이 손을 대면 안되는 전리품에 손을 댄 아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저지른 잘못은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전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전한 이유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자기 물건들 가운데 두었기 때문이라 지적하신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이들이 간혹 성경에 나온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전쟁의 전리품을 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온전한 헌신을 하기로 했다가 속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구 것인지를 알면 누구에게 드려야 할지를 알게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 생명과 삶을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들을 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기 하옵소서. 주님께 온전한 헌신과 거룩한 희생을 드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공훈목사 / 신금호교회


토- 축복의 비밀1
본문: 민14:28, 잠13:2
찬송가 : 540장
 
지난 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죽음의 말인 원망과 불평을 하고 살았는가? 안된다고 함부로 말하고 화내고 살지는 않았는가? 말에는 생명의 말이 있고 죽음의 말이 있다. 그 말이 그 사람이고 지금의 나는 내 말의 결과이다.
 
사람은 말하는 대로 산다.
 
말을 잘하면 잘 살고 말을 못하면 못산다. 그래서 혀 밑에 살리는 말도 있고 죽이는 말도 있다. 우리 인생의 배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말이라는 키이다. 말은 그만큼 소중하고 우리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말로 사람의 기를 살리기도 하고 사람의 기를 팍팍 죽이기도 한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모든 말 중에 최고의 말은 바로 감사의 말이다. 감사는 어떤 사람이 할까? 학벌이 좋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건강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감사할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면 그렇지 않다. 감사는 깨닫는 사람의 몫이다. 쉽게 말해 철든 사람이 감사한다. 사람이 철드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일찍 철이 든다. 은혜는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 깨어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깨닫는 사람만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주께서 베풀어 주신 이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하고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다. 감사는 깨어 있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숨겨진 보물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확연히 다른 생을 살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갈망한다. 그러나 행복의 열쇠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잘 발견하지 못한다. 행복의 열쇠는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다. 우리는 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저 생각나는대로 기분 내키는대로 말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평범한 일상, 지극히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인생의 최고봉은 바로 감사를 발견하는 것이다. 행복의 열쇠가 감사이기 때문이다. 감사는 우리 주위의 좋은 것들을 끌어오는 자석과 같다. 다시 말해 감사 속에는 축복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다. 감사의 안경을 끼고 주위를 둘러보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 죽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만도 감사한 일이다.
 
머린 케로더스가 지은 '찬송생활의 권능'이란 책을 보면 아내의 몸에 고도비만이 찾아오자 남편이 집을 나가 버렸다. 그 후 원망과 불평으로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당뇨를 비롯한 성인병으로 생을 포기하고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을 때 케로더스 목사를 만나 그의 권고로 하나님께 계속해서 감사함으로 모든 질병이 치료되고 남편도 돌아와 가정이 회복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감사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요, 펌프의 마중물과 같은 것이다. 작은 감사가 큰 축복을 불러오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있으리라.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이제껏 아무렇게나, 함부로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대로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후로는 감사의 말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판석목사 / 여수안디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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