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를 갖춘 첫 패전트, '예수'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패전트 '예수' 공연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9월 03일(월) 14:17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십자가의 길'과 같은 야외이동극은 '패전트(pageant)'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극이나 중세 유럽의 기독교연극 공연에서 주로 사용하던 형식이었다. 야외극 '십자가의 길'은 역사적인 2000년을 맞으며 부활절기 행사로 큰 규모를 갖추게 됐다. 말하자면 제대로 된 패전트가 가능해진 것이다. TV탤런트, 연극배우, 영화배우, 코메디언 등 기독교인 연기자 약 40명과 전문 스태프들이 동원되었으며 의상, 소품, 조명과 음향과 영상장비, 세 군데의 가설무대 등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여전히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위원회가 주관한 행사로 올네이션스 경배와찬양팀과의 연합이벤트였다. 극의 내용을 확대했으며 제목도 '예수'로 바꾸었다. 무대는 대학로의 마로니에공원 일원을 장면 별로 구획을 나누어 공원 어귀의 야외극장 스탠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그 옆의 가설무대는 가야바의 관저로, 또 다른 가설 무대는 헤롯궁, 미술회관 입구의 계단은 빌라도의 총독관저, 공원의 산책로와 대학로 큰 길은 십자가 행렬의 이동경로로 배치했다. 각 장면은 중단 없이 이어지고 관객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연기하는 배우들과 같은 동선으로 이동하며 관람하도록 패전트의 관습을 충실하게 따랐다. 패전트의 장점은 이처럼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모호하며 이동과정에서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극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연배우만 수 십 명에 달하는 대부대가 전원이 지속적으로 모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어서 충분한 연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모두 경력이 화려한 전문 배우들이었기 때문에 두어 번의 대본 읽기에 이어 개괄적인 극의 흐름과 정서, 큰 동선과 히브리인들의 반응 등을 주지시키는 것으로 연습을 대신했다.
 
기독교인 연기자들이 거의 망라된 최초의 패전트가 2000년 고난주간 금요일 저녁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서 막이 올랐다. 이미 오후부터 전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동숭교회에 모여 도시락으로 식사를 마친 후 분장에 들어갔다. 의상과 소품을 분리하여 지급하는 것만도 몇 시간이 족히 걸렸다. 어둠이 내리면서 마로니에 공원 현장으로 이동한 우리는 먼저 함께 손을 잡고 뜨거운 마음으로 합심기도회를 가졌다. 우리의 갈급한 기도가 공원 안에 메아리쳐 울렸다.
 
연출을 맡은 필자가 다시 한번 연기구역과 동선을 확인시킨 다음 배우들은 부분 연습을, 스태프들은 장비 점검에 들어갔다. 그때까지의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지만 예상치 못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먼 거리에 있는 관객들을 위해 실황중계용 멀티스크린을 동원했는데 작동이 되지 않은 것과, 헤롯 역을 맡은 탤런트 이 장로님이 드라마 촬영 관계로 합류가 늦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개막을 마냥 늦출 수는 없어서 일단 공연을 시작했는데, 헤롯 궁 장면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문제가 해결됐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일화가 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여인 역을 맡았던 유명 개그우먼 안 집사님이 갑자기 심각한 어조로 부탁을 해왔다. "장로님, 예수님을 저주하는 약역 말고 선한 역을 주시면 안돼요?" 난감했다. 지금 와서 어쩌라고…. "집사님,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연기는 연기일 뿐이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루자구요." "그래도 선한 역을 하고 싶은데…" 결국 안 집사님은 채찍 맞으시는 예수님 뒤를 따라가며 흐느끼는 히브리 여인으로 역할이 바뀌게 됐다. 희극배우가 비련의 여인이 된 것이다.
 
대학로의 대로로부터 경배와찬양팀의 찬양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고 그것을 개막음악 삼아 베드로 역의 한 장로님이 첫 대사를 하는 것으로 패전트 '예수'는 시작됐다. 마로니에 공원을 산책하던 시민들이 히브리 의상 차림에 분장을 한 낯익은 배우들을 알아보면서 모여들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고맙게도 관중들은 극을 따라 함께 이동해줬고 십자가 행렬이 대학로 큰 길로 나왔을 때는 어마어마한 군중이 십자가의 길을 한 마음으로 주목했다.
 
주무대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골고다 장면.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가 수직으로 서는 순간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무대 바닥에 미리 뚫어놓은 구멍에 십자가를 꽂은 다음 쐐기로 고정했는데도 체중이 실린 탓에 예수님 역의 정 집사님과 실물 크기의 십자가가 함께 앞으로 기우는 것이다! 주여…! 그러나 천천히 기울던 십자가는 곧바로 중심을 잡더니 이내 완성됐다. 후일담을 들었는데 그날 정 집사님은 순교하는 줄 알았단다.
 
연습 부족과 홍보의 미흡함, 장비의 문제 등 부족한 부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패전트 '예수'는 그렇게 기독교 공연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