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II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공연 '십자가의 길' 비화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8월 29일(수) 09:35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야외극 '십자가의 길' 공연에도 기억할만한 비화들이 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무렵, 우리는 다시 마음을 추스리며 고난주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해에는 영락교회 광장이 주무대가 되어 십자가 행진이 시작되면 명동거리를 거쳐서 퇴계로를 돌아 남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로 접어든 다음 긴 행진 끝에 남산 식물원 입구의 백범공원에서 마치도록 계획을 세웠다.
 
기획팀의 노력으로 기마경찰대의 협조를 얻어 십자가 행진기렝 처음으로 말을 탄 기수가 배치된 것도 그 해였다. 공무원 복무규정 상 특정종교의 행사에 동원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기마경찰관 두 사람에게 로마군병 의상을 입힐 수는 없었지만 십자가 행렬의 선두를 말 두필이 이끄는 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 큰 효과가 있었다. 그려면서 언젠가는 승마인 신우회(명칭이 맞는지 모르겠다.)가 동참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에 로마 기병들이 포진한 멋진 스펙타클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 봤다.
 
행렬이 명동으로 접어들자 예상대로 많은 시민들이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부장의 지시에 따라 노상에서 행렬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장면에서는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오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십자가 행렬이 남산 오르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질 구레네 시몬은 유명 코메디언 출신인 신 목사님 차례였다. 목사님은 십자가를 인계받아 어깨에 지는 순간부터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배우들을 포함한 모든 참가자들이 숙연해지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선도 차량 안에서 최선자권사님과 필자가 낭송하는 성시와 성경구절이 계속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사이 십자가는 다시 예수님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로마 군병이 예수님에게 채찍을 다시 내리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울며 배우들 뒤를 따라오던 노 권사님 한 분이 갑자기 로마군병 쪽으로 돌진하더니 어디서 힘이 났는지 채찍을 빼앗아 던져버렸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사태에 모두 놀랐다. 그러나 극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 그 권사님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이천여 년 전의 그 슬픔의 길, 비아 돌로로사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사건인 것처럼….
 
어느 해인가 미국의 기독교 뮤지컬 팀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극화한 '더 프라미스(The Promise)'라는 작품을 가지고 부활절기에 맞춰 내한공연을 왔을 때 예수님 역과 빌라도 역 등 주요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십자가의 길' 공연에 동참하게 됐다. 필자완 단 몇 시간 만나서 조율한 후 짧게 연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본도, 언어도 다른 두 팀이 거의 완벽하게 협연을 마칠 수 있었다. 우리는 국어로, 그들은 영어로 대사를 했지만 배우들 사이의 소통이나 관객들과의 교감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감사할 뿐이었다.
 
또 한 해는 공연 날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고심 끝에 십자가 행렬이 거리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영락교회 광장을 몇 바퀴 돈 후에 십자가 장면으로 끝내기로 조정했다. 배우들은 공연의상 속에 비옷을 입었고 관객들에게도 비옷을 나누어줬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 속에서 배우들은 혼신의 연기를 펼쳤고, 기도회를 마친 후 합류한 관객들은 비옷과 우산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빗줄기 아래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고 있었다.
 
빗물로부터 음향콘솔을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작은 텐트 안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필자의 눈에 그것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이나 바로크 명화처럼 보였다!


최종률장로/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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