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회, 제60회 총회장 이상근, 한완석 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이상근, 한완석 전총회장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8월 28일(화) 10:18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제59회 총회장 이상근 목사

(李相根, 1920-1999)목사는 대구에서 이연우와 서부잡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이 부모의 손에 이끌리어 교회를 다녔다. 수창보통학교를 졸업을 하고 몸이 허약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구열은 대단하였다. 검정고시로 중등과 과정의 자격을 얻어 내는 데 성공을 하고 그 자격을 갖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인가를 얻었던 평양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1944년 3월에 제4회(통산 39회)졸업생으로 1945년 4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평남교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해방을 만나자 월남하여 대구 대봉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대구 대봉교회 목회시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교와 프린스톤신학교에 각각 1년간 씩 연구 생활을 하다가 1957년 대구제일교회의 청빙을 받고 그 교회에서 은퇴 할 때 까지 시무를 하였다. 다시 미국 택사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계속해서 대구제일교회에서 사역을 하였다. 때마침 대구지방에도 합동 측과 통합 측의 극심한 분열이 있었지만 어느 쪽이 대구제일교회의 정서와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가질 수 있을 까 고심하던 중 뿌리를 지키어야 한다면서 대구제일교회를 통합 측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자 대구지방의 많은 교회들이 이상근 목사의 노선을 따르면서 많은 교회들이 통합측에 소속되게 됐다. 특별히 대구제일교회는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배위량 선교사가 설립하였으며, 그는 안의와 선교사에게 모든 책임을 맡기고 평양 선교부 설립에 힘을 쏟았다.
 
이상근 목사는 역사를 바로 인식했기 때문에 자신이 학위를 받았던 미국의 정통주의 학교인 달라스신학교의 신학노선이 바로 통합측이 가는 길이란 것을 알았기에 흔들림 없이 그 길을 택하였다. 역시 그는 달라스신학교에서 신약학으로 학위를 받았기에 신약학을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까지 출강하면서 강의를 한 일도 있었다. 특별히 그의 독특한 경상도 사투리는 강의시간마다 사용하였기에 다른 지역 출신 신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놓칠세라 열심히 필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구제일교회에서 그의 실력을 인정했던 관계로 1966년 10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약 5개월간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학문의 길을 넓혀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그의 설교는 더욱 은혜가 넘쳤으며, 매 주일 새로운 신자가 모이는 등 교세가 날로 성장해 갔었다. 이상근 목사는 지역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면서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영남신학교(현 영남신학대학교) 교장의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다시 1980년도부터 영남신학교 교장직을 수행 한바 있으며 그의 노력으로 오늘의 영남신학대학교로 발전하는 데 기틀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일은 바쁜 목회, 신학교 강의 하는 가운데서 그가 평소 집필하기를 원했던 '신약 성서 주해 전집 12권'을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집필하여 발행하였다. 또 작은 복음(1962), 한 가지 실존(1973), 마음의 천국(1975), 집 모퉁이의 머릿돌을 찾아서(1979), 내가 믿습니다(1979), 약주신약성서(1980) 등을 세앙에 내 놓았다. 한국 목회자들에게는 설교 준비하는 일은 물론 강해하는 데 좋은 참고서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의 주석은 어느 서점에서든지 쉽게 접할 수 있으며, 혼자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설교준비가 저절로 되는 좋은 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는 오직 한 가지 일에 성실하게 노력 한 결과이지만 그의 영력의 힘은 기도에서 이루어 졌음을 모두들 이야기 하고 있다. 총회 법에 따라 1990년 은퇴를 하면서 원로 목사로 추대를 하였으며, 그의 대를 이은 이성희 목사(서울 연동교회)가 바로 그의 자녀이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서 교권에 뛰어 들지 않고 오직 학구와 목회에 열중하고 있다.   
 
제60회 총회장 한완석 목사

한완석(韓完錫, 1922-2007) 목사는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출석하다가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흥문중학교를 진학하고 졸업하고 귀국을 하였다. 귀국 후 조선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1947년 새 학기를 맞이하자 김재준 교수의 신학방법론이 문제가 되어 이 일로 바른 정통신학을 고수 하겠다는 한국교회의 신학을 재 자리에 옮기어 놓아야 한다는 일에 앞장을 섰다. 때마침 한국교회의 정통신학자의 대부인 박형룡 박사가 51명을 중심하여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이때 51명 신학생들은 모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게 되었다. 1949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을 한 한완석 목사는  1954년 익산에 있는 송학교회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다시 1956년 군산동부교회의 위임목사 청빙을 받고 군산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역시 젊은 나이었지만 1958년 제13차 세계 면려회(C. E)한국 대표로 독일 대회에 출석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세계를 향한 눈이 뜨이면서 총회를 이끌고 갈 차세데 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합동 측과 통합 측과의 분열 속에서도 군산동부교회를 이끌고 왔었다. 1967년 제52회 총회 총무로 취임하면서 매주 군산동부교회 강단을 지키면서 많은 수고를 하던 중 1973년 광주의 모교회인 광주제일교회의 위임 청원을 받고 목회 지를 광주로 옮기게 됐다. 1975년 9월 제60회 총회가 광주제일교회는 총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한완석 목사는 총회장으로 선임됐다. 광주제일교회에 부임한지 2년 만에 총회장을 선임되었다. 광주제일교회에서 22년간의 목사 사역을 마감하고 은퇴를 한 후 원로목사 됐다. 그가 재임 중 상무대에 교회부지 1천 평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 종교 부지를 다른 교단에서 탐을 냈었다. 이때 한완석 목사는 각 교단의 대표자격인 목사를 초청하여 광주의 모 교회는 광주제일교회이기 때문에 이에 동의를 요청하자 모든 교단 대표 급 인사들이 동의를 하자 그 자리에 현재의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