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상)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부활절 공연의 추억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8월 17일(금) 14:06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1999년 이른 봄날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위원회(한부연)의 한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부활절연합예배 직전인 고난주간 성금요일에 십자가 대행진 행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연출을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평소 절기행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로서는 기도의 응답이었다. 한국교회가 문화선교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데다가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에 행하는 절기행사도 개교회 중심의 이벤트에 불과해서 선교적인 의미는 거의 없었다. 그에 반해 불교의 경우, 예컨대 석가탄신일에 맞춘 연등행사 하나만 보더라도 그 압도적인 규모와 화려함이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고 매스컴의 집중조명을 받아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만큼 불교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세를 과시함으로써 얻어지는 포교효과가 있을 것은 자명하다.

곧바로 한부연의 실무자들과 만나 행사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구체적인 시행계획과 기획안을 짜기 시작했다. 마침 필자에게는 얼마 전에 궁연했던 'He'의 극본이 있었고 그 가운데 예수님의 수난 부분은 언제라도 야외현장극으로 공연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오묘했다. 행사의 기본 틀을 야외현장극으로 잡고, 기도회 - 야외극 - 십자가 가두행진 - 야외극 - 기도회로 이어지는 구성을 택했다. 먼저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며 기도회를 가진 후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부분 공연이 시작된다. 빌라도로부터 십자가형을 언도받는 장면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로마군병의 채찍을 맞으며 거리를 행진하는 '비아 돌로로사' 장면이 이어지며,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평신도, 정치인, 교육자, 노동자와 농민, 청년들이 교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는 구레네 시몬이 된다.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긴 십자가의 길을 자원하는 성도들이 행렬을 지어 따라간다. 성시와 성경구절 낭송, 찬양과 고난을 표현하는 음악이 노상에 흐른다. 마침내 십자가 행렬이 골고다에 다다르면, 처형과 예수님의 가상칠언, 그리고 운명하심이 다시 드라마로 펼쳐지고 슬픔의 군무 후에 회개의 기도회로 야외극은 모두 끝나게 된다.

1999년 4월 고난주간의 성금요일 정오 쯤 덕수궁에서 '십자가의 길' 첫 공연이 시작됐다. 빌라도의 총독관저로 설정한 덕수궁 내의 석조전과 골고다로 설정한 남산공원, 그리고 십자가 행진의 이동경로인 남대문로에서 퇴계로를 거쳐 남산에 이르는 도로의 이동에 관해서는 행정 당국의 허락을 미리 받아두었다. 탤런트 신우회를 중심으로 평소 필자와 오래도록 동역해 온 연기자들이 기꺼이 힘을 모아 주었다. 기획팀에서 열심히 뛰어다닌 덕에 의상과 소품들도 잘 갖추어졌다.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헌신적이었지만, 특히 예수님 역을 맡은 정선일집사님(탤런트 신우회 회장)은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절식과 금식으로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살을 빼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비록 예산이 너무 적었고 홍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행사의 규모를 갖추기에는 많이 부족했지만 의미와 내용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부족했던 부분은 첫 시도에서 겪은 시행착오로 받아들이고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기로 다짐하면서 '십자가의 길' 공연을 해마다 부활절 절기행사로 정례화하기로 결의했다. 그후 이 야외극 이벤트는 성탄절기의 메시아 대합창 연주회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절기행사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 같았으나 안타깝게도 2004년 공연을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거기에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주관하는 기관이 한부연에서 한기총으로 바뀐 것과 행사비 재원 마련의 어려움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문화선교에 대한 기독교계의 인식에 원인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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