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ㆍ애국ㆍ선교의 여전도회 정신 계승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여전도회 정신의 계승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8월 14일(화) 14:47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여전도회의 역사를 정리하는 가운데 나는 여전도회의 정신과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되었고, 그 목적이 언제 어떻게 실천되었는지 파악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도회의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회장직을 수행했고 그 역사를 계승하는 데 열정을 바친 회장이 되고자 했다. 여전도회가 시작된 역사를 다시 한번 소개하자면, 여전도회는 1898년 평양 널다리골교회의 여성들이 이신행여사를 중심으로 신반석, 김정선 여사 등 63명이 여전도회를 조직함으로써 시작됐다. 여성들이 흔히 조직하는 계모임 같은 성격으로 여전도회가 시작된 것이 아니고 아주 분명하고 뚜렷한 목적, 곧 '복음전파'를 위해 조직됐다. 이 여성들이 예수 믿기 전에는 그들이 보는 세계가 내 집 울타리 안이었다. 여성의 눈높이가 자기 집 담장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저 내 집안 식구들의 무사함과 안녕을 빌었고 그것이 여성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 부엌의 부뚜막에 신주단지를 갖다 놓고 끼니 때마다 신령님께 손 비비고, 이른 아침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새벽이슬 맞으며 빌고, 안방 살강 위에 신주단지를 갖다 놓고 성주님께 비는 식으로 집 안에 모셔 놓은 여러 귀신들에게 내 가족의 무사와 안녕을 비는 것이 여성의 관습이었다. 그러했던 여성들이 예수를 믿으니 새로운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성의 눈높이가 집 담장을 넘어서고 여성의 눈길이 대문 바깥으로 나서니 이제는 내 가족, 내 식구, 내 집안을 넘어 우리나라의 사회 현실이 보이고 민족의 현실이 보이고 구한말 시대의 망해 가는 조선의 국제정세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당연하다고 여기던 조선시대 가부장적 가족질서가 낡은 시대의 해묵은 관습이라는 의식이 들었다. 여성들의 눈이 밝아졌고 그들의 생각과 의식이 계몽되기 시작했다. 사회를 보는 안목이 생기고 민족을 걱정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이에 일제의 강제적 식민지배가 시작되자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에스더나 드보라가 본받고 따라야 할 인물로 보였다. 요즘 시대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면, 성경의 여인들이 우리나라 초창기 기독교 여성들의 멘토가 된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1913년 평양에서 '송죽회'를 조직해서 성경의 에스더와 드로라처럼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도로 찾으려 했다. 송죽회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독립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송금했다.
 
하나 더, 여성 단체 '조선애국부인회'가 있었는데 이 단체는 1919년 3ㆍ1 만세 운동을 계기로 조직됐다. 정신여학교 출신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교회 여성들이 주축이 된 조선애국부인회는 먼저 남녀평등의식을 가졌다. 여성도 남성처럼 독립적 인격체라는 자각의식이었다. 여성이 독립된 인격체라면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나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했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 여성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 의식이 새롭게 깨어났고 여전도회는 이제까지 한국 역사 속에서 남성의 독점적 영역이었던 교회와 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즈음에 여성들을 위한 기독교학교(이화, 정신, 숭의학당 등)가 설립되어서 교육받은 지식인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여성 지도자들은 철두철미하게 여성 의식을 가졌고 나라를 몸으로 사랑하는 애국의식을 가졌으며, 세상 속에서 봉사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식을 가졌다.
 
이리하여 나는 여전도회의 3대 정신을 여성 의식과 애국의식, 선교의식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을 가진 여전도회의 활동을 살펴보니 그 특성이 뚜렷하게 파악되었는데, 그것은 '선교하는 여성', '목회 동역자로서의 여성', '섬김의 여전도회'였다. 나는 이러한 여전도회를 먼저 우리 후배들에게 전수해 주고 싶었고, 여전도회로 하여금 계속해서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이바지하고 사회에서도 섬김의 지도력을 발휘하게 하고 싶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여전도회는 우리 단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데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섬기는 데 최우선 가치를 두고 있다. 즉, "교회에 여전도회가 필요하므로 여전도회가 존재하는 것이지, 여전도회 때문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전도회의 정신과 목적 그리고 실천은 우선적으로 교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식으로 여전도회의 역사자료를 모으고 그 자료를 정리하여 집필하는 한편 종종 회원들 모입에서도 여전도회의 정신과 여성 의식을 불어넣어 주고자 강의에 심혈을 기울였다. 집필과 강의를 통한 여전도회의 여성의식 고취, 이것이 내가 4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여전도회의 발전에 미력하나마 기여해 온 점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여전도회는 그저 그런 여성단체로 머물러 온 것이 아니라 철저한 여성 의식과 목적의식을 가진 선교와 교육, 봉사단체로서 그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왔던 것이다. 한국교회 120여 년 역사 속에서 각 시대마다 최고 엘리트 여성들이 전국의 여전도회를 이끌어가는 한편 사회에서도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분들의 지도력으로 여전도회는 민족문제, 사회 제반의 문제, 세계 선교 문제 등 미시적인 주제로부터 시작해 거대 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그러한 활동은 교육을 통한 여성 지도자 육성과 양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교회의 선교 초창기에는 여성 전도를 위해 짧은 기간에 여성 전도인들을 훈련시켜서 "전도부인"을 양성했다. 전도부인들의 소위 '안방전도'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큰 효과를 나타내자 전국 여러 지방에서 여자고등성경학교가 설립됐다. 1923년 평양에서 여자신학교가 설립됐고 1936년 원산에서 마르다신학교가 설립됐다. 여성 신학 교육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교단의 총회와 나란히 애쓰고 힘썼다. 그러한 과정에서 교회여성 지도자들이 육성되었다. 이러한 여성 교육의 전통을 파악한 나는 "여전도회라는 단체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이 단체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해야겠다. 그 정신을 계승하는 통로는 교육이다"라고 파악했다.

이연옥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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