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0~25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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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8월 14일(화) 11:43

월-감탄의 연속
본문 :습 3:14-17 
찬송가 : 73장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도구사용 유무의 차이라고 한다. 그러나 침팬지는 땅 속에 있는 개미를 잡으려고 나뭇가지를 사용한다. 또 어떤 이는 동물의 인지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즉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말한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언어에 있다고. 그러나 침팬지를 실험해 보면 그도 언어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사람과 다른 포유류와의 구별점은 무엇일까?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계명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교수가 독일에서 연구한 바에 의하면 백인이건 흑인인건 한국 사람이건 모든 엄마들이 아기를 키우면서 하는 행동이 있다고 한다. 바로 '감탄'이다. 이 감탄사가 다른 포유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아기는 엄마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전쟁고아를 데려다가 아무리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잘 입혀도 이 아이들의 발달은 다른 정상 아이들보다 훨씬 늦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변화를 보고 감탄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날마다 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이 지으신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말하는 데 이도 역시 감탄이다. 태초에 지어진 에덴동산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그 아름다운 동산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탄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곳에 죄가 들어오며 감탄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되고 결국 인간은 변명과 핑계, 시기와 질투, 미움과 다툼, 수많은 전쟁과 아픔이 가득하기 시작했다. 감탄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한탄의 삶으로 변질되었다.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감탄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습3:14)." 이 말은 결국 '이스라엘아 하나님을 감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늘 감탄하며 살라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탄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모든 찬양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감탄이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감탄하고 계시다. 본문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감탄하고 계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신앙은 감탄의 연속이다. 하나님 안에서 감탄하며 살 때 신앙은 건강해진다.
 
<오늘의 기도>
날마다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는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속에 물들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의 감탄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영적 감탄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사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수훈목사 / 동빙고교회


화-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본문: 행 3:1~10
찬송가: 91장
 
날마다 제 구시에 성전에 올라 기도했던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권세가 있던 자들이다. 그들 스스로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에게 임했던 예수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로 인하여 불치병이었던 앉은뱅이를 고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해결의 열쇠.

6절 본문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는 앉은뱅이된 자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선포한다. 베드로가 왜 '은과 금'을 먼저 언급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선포했을까? 그것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이 더더욱 주목하여 보아야 할 부분이다. 물질에 현혹되어 물질이면 무엇이든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물질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님을 정확하게 나타내고자 은과 금을 거론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임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둘째, 예수그리스도의 권세.

예수그리스도의 권세는 앉은뱅이의 육적인 병만 치유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 또한 터치하여 그의 삶을 전반적으로 회복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의 완전한 회복과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영적인 부분까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제자들에게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고, 우리 또한 그 예수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 손을 잡아 일으켜준 제자들.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병자였기에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얻었지만 일어나는 법도, 걷는 법도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일으켜 주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몫이었다.
 
그들의 도움의 손길로 인하여 마침내 앉은뱅이는 일어날 수 있었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방법도 찬양하는 방법도,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고, 힘을 쏟아 기도하는 방법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마치 새롭게 태어난 영유아와 같이 걸음마를 띄기 시작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구원의 백성이 되는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지만, 온전히 신앙 안에 세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된 자들의 도움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했다.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주 안에서 세워졌다면, 이제는 일으켜 세우는 자가 되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영적인 제자가 되자. 우리에게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으로 부흥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자.
 
<오늘의 기도>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며, 좌절한 자를 회복시키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그 놀라운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여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의 제자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선범목사 / 효자천성교회


수-믿음의 경주를 하자
본문: 히 12:1~3.
찬송가: 360장
 
2012년 런던 올림픽 열기가 뜨거운 태양열 보다 더 뜨거운 듯하다. 오랜 기간의 각고의 노력과 훈련을 통하여 값진 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인생여정을 운동경기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자세로 달리며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본문 말씀을 통해 신앙의 경주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나눈다.

첫째,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에 우리 주위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믿음으로 승리한 신앙의 선배들이 응원하며 격려하고 있으니 힘을 내어 달리라고 말씀한다. 죽는 날까지 계속 달려야 하는 일생의 장거리 경주를 할 때 때로는 숨이 헉헉 막히는 고통의 순간도 다가온다. 너무 지쳐서 한발 짝도 더 내딛기 힘들 때에도 중간에 멈출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경주이다. 그런데 결코 혼자서 달리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기록되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허다한 증인들이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을 열렬하게 응원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신다.
 
둘째,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자.
 
필요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신앙의 경주를 하는 자는 무거운 것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걱정, 근심. 인간적인 염려, 잘못된 습관, 명에, 욕심, 그리스도인에게 맞지 않는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를 벗어버려야 한다. 죄악의 무거운 짐들은 인생길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우리를 속박한다. 소경 바디매오는 길에서 구걸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부르자 바디매오는 자기 겉옷을 벗어던지고 즉시 달려 나온다. 겉옷은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지만 예수님께 가는데 장애가 되므로 벗어던지고 달려 나온다. 어떻게 이 죄악의 짐을 벗어 버릴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힘입어야 한다.
 
셋째, 예수를 바라보자.
 
경주자는 목표를 똑바로 보고 달려야 한다.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달리기 선수들이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처럼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한다. 본문 말씀 2절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다. 여기에서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으로 오래 참으심 인내를 들 수 있다. 예수님께서 승리할 수 있는 인내의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오직 푯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신앙의 경주를 하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돌보시니 감사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바리고 어떤 고난과 시험이 와도 예수님만 바라보며 늘 승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덕자목사 / 비전교회


목-주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본문: 갈 6:11~18  
찬송가: 94장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던 목사님이 계셨다. 집안이 가난해 끼니거리가 없는데, 그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물을 잔뜩 마셔서 물배를 채우고 홀로 뒷산에 올라가 팔을 베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배는 물로 채웠는데, 이 가슴은 무엇으로 채울까?"라고 생각했다.
 
'배를 채우는 것'과 '가슴을 채우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배만 불러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가슴이 채워져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배가 부르듯, 가슴도 불러야 한다. 아니 배가 고파도 가슴이 불러야 한다.
 
본문에는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12절에서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13절에서는 '육체로 자랑하려 하는 자'라고 했다. 바울 당시에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많은 재산을 추구했고, 높은 지위, 종교적 명예를 추구했다. 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신앙인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랑했다. 그 순간 그들의 교만과 욕망의 배가 자랑스러움으로 채워지곤 했다. 
 
바울도 한 때는 그런 인물이었다. 정통 유대인이요, 당대 최고의 율법 선생이었던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흐뭇했고, 배가 불렀다. 그러나 배가 불렀는데도 만족과 기쁨이 없었다. 그가 추구해 온 삶이 배는 부르게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가슴을 채울 수는 없었다.
 
신앙의 목적은 가슴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배를 부르게 할 것들이 아무리 유혹해도, 가슴을 채울 것을 선택한다. 참 신앙인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슴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가슴을 채우는 것'은 '영의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영의 양식은 무엇일까?
 
어거스틴이 어느날 밤,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결에 주님을 만났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물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게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어거스틴이 대답했다. "주님! 저는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을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요, 주님으로 가슴이 채워진 사람은 주님의 모든 것으로 가슴이 채워진 사람이다.
 
주님으로 가슴이 채워진 사람은 더 이상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남들이 좀 더 많이 가졌다고 해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으로 채워져 새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으로 우리의 가슴이 채워지게 하셔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새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광우목사 / 양일교회


금-깊은 곳으로의 초대
본문: 눅 5:1-11
찬송가: 432장
 
중국의 한 선교사가 가뭄이 심한 논에 밤새도록 물을 대고 다음 날 아침 논에 가보니 이웃 농사꾼이 몰래 물을 빼어 자기 논에 물을 채워놓았다. 속상한 마음을 참고 다음날도 열심히 수고하여 물을 대었는데 또다시 이웃 농사꾼이 물을 빼어 자기 논에 채웠다. 참다 못한 선교사가 시비를 따져서 물을 도로 찾아 자신의 논에 가득 채웠다. 그날 밤 잠을 못 이루던 선교사가 '주님 제가 오늘 정당한 일을 했으나 마음에 평안함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내가 너를 이 땅에 보낸 것은 정당하고 옳은 일만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가뭄으로 목말라하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의 영광스러운 일, 위대한 일을 행하도록 보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도 영광스럽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초대받은 자리이다. 오늘의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깊은 곳의 초대는 어떤 것일까?
 
첫째, 빈 배로의 초대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던 때는 그가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잡은 것이 없어 괴로운 하루였다. 빈 배와 빈 그물 그리고 빈 손의 모습으로 돌아온 베드로에서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빈 배의 주인으로서 베드로를 깊은 곳으로 초대하신다. 배에 가득 채우는 만선의 전제조건은 바로 빈 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 배일 때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 승선하실 수 있는 공간과 여유가 생긴다. 영성가 글랜힐슨은 오늘날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첫째, 너무나 바빠서 시간이 없고 둘째, 세상의 시끄럽고 소란스러움 셋째, 군중들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도 주님은 빈 배의 인생을 찾으시며 우리를 내려놓음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둘째, 깊은 곳으로의 초대이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깊은 곳이란 첫째, 주님과 교제하는 깊은 곳으로의 초대를 의미한다. 세상과 멀리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에서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 말씀의 깊은 곳으로의 초대이다. 어부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 의지해야 도달할 수 있는 말씀의 깊은 곳을 의미한다. 파스칼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다. 셋째,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깊은 곳이다. 인류구원의 놀라운 계획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깊은 사명의 바다로 초대하신다.
 
셋째, 만선의 기쁨으로의 초대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깊은 곳에서 만선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물고기와 배를 버려두고, 그들의 인생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됨의 만선과 사명의 만선의 기쁨을 누렸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깊은 곳에 도달하는 신앙인이 되자.
 
<오늘의 기도>
빈 손과 빈 배의 인생에 찾아오셨던 주님! 주님께서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깊은 곳으로 가서 삶의 만선, 영혼의 만선의 축복을 받아 주님을 바르게 따르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호임목사 / 베다니교회


토-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3)
본문: 요한복음 2:1-11
찬송가: 289장
 
물 떠온 하인들이 만났던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
 
예수님은 이 첫 번째 표적을 통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표적이란 의미(메시지)를 전달하는 기적이다. 따라서 이 첫번째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첫째, 변화시키시러 오셨다는 것이다.
 
변화에는 두 가지 변화가 있다. 첫째, 신분의 변화이다.

연회장이 맛본 극상품의 포도주는 포도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포도알갱이 하나 들어가지 않은 맹물이었고, 그릇마저도 포도주를 담았던 그릇이 아니었다. 도저히 포도주가 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없는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물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극상품의 포도주로 변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기적을 체험한 하인들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 떠온 하인들이 체험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주님이셨다는 사실이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사역의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신분을 변화시키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사단의 종이요,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을 변화시키러 오셨다. 사망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러 오셨다.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러 오셨다. 지옥백성을 천국백성으로 변화시키러 오셨다. 가치 없는 존재를 가치 있는 존재로 변화시키러 오셨다. 맛이 없는 존재를 맛있는 존재로 변화시키러 오셨다. 주님은 우리 인생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영벌에서 영생으로, 저주에서 복된 존재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천국에서 이 땅에 파송된 첫 번째 선교사이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지옥백성, 저주받은 인간, 사망의 몸, 영벌에 처하였던 존재, 무가치한 존재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존재들을 천국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의 존재로, 가치 있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이 주님을 믿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이다.
 
둘째 삶의 변화이다. 민족의 피를 빨아먹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베푸는 사람으로 변한 것을 보라. 떳떳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피해 다녔던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오히려 사람들을 찾아가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보라.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사울이 그 예수님을 전한 바울이 되었던 것을 아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변화가 있는가? 신분은 변화되었지만 혹시나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닌가?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을 변화시켜주신 아버지 하나님, 이제 소금처럼 빛처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삶으로 복음을 말하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주환목사 / 석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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