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6~11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8.6~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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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8월 02일(목) 14:33

[가정예배]

월-삭개오의 열정
본문: 누가복음 19장 1~10절
찬송가: 90장
 
본문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위해 뽕나무에 오르는 장면이다. 삭개오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외모적인 단점이 크게 부각되었던 자이다. 그러나 사람과는 다른 관점을 갖고 계신 예수님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원동력으로 주님께 달려오는 삭개오를 기뻐하셨다. 현대생활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자신의 콤플렉스 앞에 좌절할 이유도 없고, 또한 자신의 관점으로 다른이를 판단할 수도 없다.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 앞에 그것들은 무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삭개오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첫째, 알고자 하는 열정이다. 예수님 앞에 나와 회개하면 구원받는 다는 소문, 병든 자를 치유하신다는 소문을 들은 삭개오는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알고자 했다. 그에게는 행동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예수님이 방법이고 해결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풀린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은 내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그로인해 모든 것은 해결된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도 주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정이 없다면 많은 것을 누리지도 알 수도 없다.
 
둘째,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데 인격, 명예, 자존심 따위는 개의치 말라. 뽕나무에 올라갈 때 삭개오는 자신의 자존심과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모든 것보다 제 1순위는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의 포커스에 나의 포커스를 맞추라.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열정을 보고 감동받으셨다. 즉, 예수님은 열정을 보길 원했고 그 예수님 앞에 삭개오는 열정을 보여드린 것이다. 예수님께 영적 안테나를 세워 그분의 관점에 주목하라.
 
넷째,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 다른 이들은 삭개오를 '사기꾼'이라 불렀지만,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그대로 불러주셨다. 주님은 우리를 알고 계시고 사랑하는 자녀의 이름으로 부르고 계시다.
 
다섯째, 주님은 우리가정에 찾아 오셔서 축복하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유하길 원하셨고 삭개오는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미리 이야기 된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쁨으로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정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심방예배”와 “사랑방예배”와 같은 축복된 시간을 기쁨으로 맞이하라.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가정에 넘치는 축복을 허락하신다.
 
여섯째, 아는 만큼 능력을 나타낸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소유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능력을 나타낸다. 예수님을 분명히 알고 그분의 치유, 회복, 용서, 영적 리더쉽을 내 것으로 만들어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삭개오의 열정을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주님. 우리들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자 하는 열정과 행함이 있게 하시며, 그것을 막는 어떤 환경적인 요소 앞에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담대하게 장애물을 이겨나가는 영적 군사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박선범목사 / 효자천성교회

 


 

화-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본문 :출 4 :1~2.
찬송가 : 325장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사용하시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삼손으로 하여금 창이나 칼에 비해 보잘것없는 나귀턱뼈로 천명의 블레셋 사람을 치셨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셨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어느 날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내라는 엄청난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감 없고 좌절감에 빠져있는 모세에게 물으신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관심을 가지신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물으신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지팡이를 들 때마다 애굽에는 열 가지 재앙이 내렸다.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 서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신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에 내밀라."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내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진행할 때에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지나 사흘 길을 수르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마라의 쓴물을 만난다. 하나님은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는 죽음의 물에 한 나무를 지시하사 모세사 물에 던지니 달게 되었다. 하나님은 쓴물 같은 죽음의 인생에 찾아오셨다. 아무 쓸모없는 죽은 막대기 같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이 기뻐쓰시는 도구가 되자. 우리는 보잘 것 없는 막대기에 불과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지면 그의 지팡이로 쓰여 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르비딤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물을 내셨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 칼보다 더 강한 지팡이였다. 마른 막대기가 하나님께 드려질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되어 지듯이 우리도 헌신하길 원하신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지 하나님께 드려질 때 하나님의 사람이 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훌륭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지식이 많으냐 없느냐 구분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빈 손 들어 그분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능력이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 하나님은 연약한 도구를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과 헌신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과 헌신을 몸소 실천하라고 하신다. 우리 자신도 나무 막대기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 받는 축복이 임하길 기원한다.
 
<오늘의기도>
하나님 아버지,감사합니다. 연약하고 능력이 없는 자라도 그분 앞에 드려질 때 가장 존귀한 도구로 쓰심에 감사드립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헌신하는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덕자목사 / 비전교회

 


 

수-하나님을 선포하라
본문 : 민 14:1 - 10
찬송가 : 545장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광야 길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정탐을 보낸다. 그리고 정탐꾼들은 결과를 보고한다. 그들의 보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 땅은 아름다운 땅이요, 풍성한 열매를 볼 수 있는 좋은 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전혀 달랐다. 여리고 성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각 지파 대표들 중에 10명은 그 땅은 삼키는 땅, 즉 우리가 죽을 땅이며, 그들에 비해서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가나안 군사들을 '우리의 밥'이요, 그 땅은 마침내 우리가 살 땅이라고 선포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 두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과도 분명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의 선포대로 이루어졌으며 부정적으로 선포한 10명의 정탐꾼과 그들의 말을 듣고 부정적으로 통곡한 백성들은 그들의 부정적인 고백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골리앗을 향한 다윗의 선포를 보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5~47)." 이 놀라운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은 깜짝 놀라셨다. 그리고 그 고백에 기뻐하며 응답하셨고, 그 작은 소년을 거인 골리앗을 이긴 용사로 만드셨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축복까지 주셨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야기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의 두 가지 사건에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선포한 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한 아비가 귀신들려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부탁한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렇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에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말(언어)'이란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게 된다. 사용되어질 때 그것은 자생력을 갖고 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신앙은 고백이다. 언어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지듯이 고백이 없는 신앙은 점점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오늘의 기도 >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험하고 힘든 세상 속에서도 우리의 입술에 결코 믿음의 고백이 끊어지지 않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사 능력 있는 주님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수훈목사 / 동빙고교회

 


 

목-로뎀 나무 그늘 아래로 초대
본문 : 열왕기상 19:1~9
찬송 : 412장
 
무더운 여름을 더욱 덥게 하는 소식이 미국 콜로라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무차별한 총기 난사 사건의 소식이다. 오늘날의 불행한 현상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백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가족과 이웃을 상실한 불행,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상실한 불행, 자기 자신을 상실한 불행이라고 했다. 본문의 배경은 엘리야 선지가가 살았던 B.C 8백85년에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가 통치했던 시대이다. 이때도 오늘의 불행처럼 영적 암흑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동분서주했던 엘리야는 심한 영적 육체적인 탈진을 경험했다. 브엘세바를 거쳐 광야 로뎀 나무 그늘 아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루만지고 먹이시고 말씀하여 위로해 주심으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오늘 하나님은 세상의 더위와 피곤함에 지친 우리들을 로뎀 나무 그늘 아래로 초청하신다.
 
첫째, '충분한 쉼'으로 초대.
 
저명한 심리학자인 폴 투르니는 현대인이 피곤과 탈진에 이르는 이유를 많은 일과 분주함으로 인한 육체적 탈진,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탈진, 불순종으로 인한 신앙적 탈진이라고 한다. 엘리야가 머물던 호렙산의 뜻은 '황폐한, 황무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황폐한 시대, 황폐한 땅, 황폐해진 신앙 위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조차도 탈진할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시고, 천사를 통해서 어루만지셔서 로뎀 나무 아래서의 충분한 휴식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비워야 한다. 다 내려놓고 충분한 쉼을 누려야 한다.
 
둘째,'회복'으로 초대.
 
어느 날, 교회 선풍기가 잘 돌아가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날개 청소를 하면서 거꾸로 조립했던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과 신앙도 거꾸로, 역방향으로 살아가기에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로 넘쳐 나고 있다.
 
당신의 인생 방향, 신앙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으로 역주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의 그늘 아래서 치유하시고, 회복하셔서 다시금 순수했던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 '부흥'으로의 초대.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로 '말하다!'라는 '다바르'란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즉, 광야는 침묵의 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라는 것이다. 엘리야는 세상의 소리인 민심과 여론에 너무 심취해서 절망하여 낙심했었는데, 오히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그 분의 분명한 음성을 듣고 잃어버렸던 사명과 사역을 회복하여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와 엘리사에게도 기름을 부은 부흥을 이루셨던 것이다. 호렙처럼 황폐해지고 황무해진 이 땅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일으켜 세우시고 말씀하실 것이다. '일어나! 가라!'고 명령하고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무더위로 우리 삶이 힘들고 지칠 때에 하나님의 어루만지심과 베풀어주시는 회복의 은혜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회복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주신 세상으로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 나라와 뜻을 부흥시킬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호임목사 / 베다니교회


 

금-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1)
본문: 요한복음 2:1-11
찬송가: 449장
 
본문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다. 9절 말씀에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이 첫 번째 표적에 동참하여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모든 과정을 알게 된 행운의 주인공들이다. 이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100퍼센트 순종한 사람들이었기에 순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순종이란 무엇일까?
 
순종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는 것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5절)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불가능한 말씀일지라도, 비상식적인 말씀일지라도, 비과학적인 말씀일지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실지라도 자기의 생각이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면 반드시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려면 일주일동안 주님이 정한대로 여리고성을 돌아야 하는 것이다. 나병을 치료하려면 더 크고 좋은 강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어야 한다. 이것이 순종이다. 순종이란 주님께 우리 삶의 주도권을 맡기는 것이다.
 
'그대로 하라.'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니 그대로 하였다. 물을 떠다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시니 그대로 하였다. 50%의 순종은 순종이 아니다. 99%의 순종도 순종이 아니다. 1%의 불순종, 이것이 위험한 것이다. 그대로 하여 거대한 여리고 성도 함락시켰던 이스라엘은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작은 아이 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삼상15:8-9)."
 
사울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멸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사울왕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며 자기가 순종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울왕의 부분적인 순종을 성경은 순종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순종이란 100퍼센트 주님의 말씀 '그대로' 하는 것이다.
 
'그대로'를 어렵게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의 경험이요, 우리의 지성이요, 우리의 상식이요, 우리의 불신앙이다. 이런 것들이 '그대로'를 어렵게 하고, '그대로'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경험, 우리의 상식, 우리 지식의 테두리 안에 두려고 하지 말자. 우리의 삶에 기적이 없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어서 하나님의 능력마저도 현실의 한계에서만 인정하기 때문은 아닐까?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
 
기억하자. 기적의 한 부분에 하인들의 순종이 있었음을.
 
<오늘의 기도>주님이 말씀하시면 주님의 말씀에 이유가 없게 하옵소서. 내가 주님의 말씀을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주환목사 / 석포교회

 


 

토-결국은 사랑입니다
본문: 요 12:1~8
찬송가: 299장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숙청되어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들에게 배급되는 음식이라고는 고작 마른 빵 한 덩어리와 약간의 국물이 전부였다. 빵과 국물이 배급되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짐승처럼 변하여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주먹질이 오고갔다. 그러는 동안에 힘이 없거나 병들어 있는 사람은 빵 한 조각, 스프 한 모금 얻어먹을 수가 없었고 병든 사람과 약한 사람은 끝내 먹지 못해서 죽어나갔다.
 
그런데 같은 수용소 안에 있으면서도 여러 달 동안 한 사람도 죽지 않는 이상한 감방이 있었다. 이곳엔 반동분자로 몰려서 수감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 사제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사제는 빵과 국물을 받으면 자기가 먹지 않고 옆 사람에게 주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망가졌던 인간성이 회복이 되고, 서서히 소리없는 사랑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날부터 사람들은 빵을 받으면 자신의 입에 넣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에게 건네주고, 수프를 받으면 자기가 마시지 않고 옆 사람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빵과 스프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그 방에서는 싸우는 일도, 음식을 쏟는 낭비도, 굶주리는 일도 없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랑보다 더 고상한 기준은 없다.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을 완성하는 마침표와 같은 것이다. 사랑이 들어가면 모든 것은 완성된다. 사랑 없이 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 때문에 움직이는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나온다. 마리아는 아끼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생명 같은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다. 그녀가 그렇게 한 한 가지 동기가 있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 눈 멀었던 여자가 마리아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사랑 때문에 향유를 쏟아 부어도 조금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어드리면서 한없이 행복했다. 주님께서는 향유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향유보다 더 고귀한 것을 원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것만이 선물이다. 사랑 없이 주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요, 대가를 요구하는 거래에 불과하다. 사랑 없이 주고받는 것은 부담스러운 빚이 된다.
 
향유를 들고 주께 나가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들고 주님께 나가야 한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어떤 동기로 세상을 살고 있는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대답할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랑 없이 말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 없이 행하지 않게 하옵소서. 조용한 사랑의 혁명이 내 인생에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광우목사 / 양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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