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운명 논리로 풀다'를 보고

[ 논설위원 칼럼 ] 운명론과 복음의 차이

곽재욱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7월 23일(월) 09:20
(논설위원 칼럼)

텔레비전 '채널 A'의 2012년 설 특집 4부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이영돈PD 운명 논리로 풀다'(이후 '운논풀'로 줄임)는 운명론을 비과학적 미신이라고 치부해왔던, 특히 기독교적 입장에 있어서는 비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복음에 대하여 악한 영들의 조종을 받는 반-복음적이라는 그간의 생각들과 가르침들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과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운논풀은 '사주, 궁합, 관상, 굿과 무당'의 어떤 형태로든 신탁을 받았을 때에 일어나는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의 반응들과 변화 같은 것들에 주목하였다.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신탁을 들은 사람의 신체의 반응과 변화를 기계적으로 측정하고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신탁들에 대한 논리적 성립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 그와 같은 운명론의 새로운 관점과 논리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우선 성경에서 운논풀과 같은 논리를 수용할 만한 근거와 본문을 찾을 수 있는가? 주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오래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사는 운논풀과 같은 설명에 대한 '잠정적 수용과 결론적 척결'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 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고 양문은 그 성전으로 들어오는 가장 가까운 문이었다. 그 문을 들어서면 성전제사에 드려질 양을 씻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위치와 함께 구조와 기능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치병의 운명신화를 탄생시켰다. 원래 베데스다는 빗물을 보관하는 인공연못으로서 60×120m의 장방형이 가운데 나누어진 한문 '날 일(日)자' 모양의 저수 시설이었다. 솟아나는 샘물이 아니었으니 맑은 물일 수 없었고 흘러온 물이 아니었으니 평소 움직임이 없는 물이었다. 그러나 강우와 저수 용량의 변화에 따라 일단 윗못에 모여 저장되었던 물이 아랫못으로 흘러들어가면서 그 물이 움직이게 된다. 그와 함께 곁에 선 성전벽과 양문, 그리고 제물로 드려지기 위하여 씻겨지는 양들과 같은 요소들이 결합하여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운명론이 형성된 것이다. 그 치병의 운명신화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을까? 운논풀은 바로 그 효과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고 주님께서도 그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으시고 잠정적 수용을 하셨던 것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베데스다의 치병 신화의 결정적 문제는 그것의 '제로섬' 즉, '합계 0의 논리'에 있었다. 합계 0의 논리란 '내 것과 네 것의 합은 언제나 0'이라는, 그러므로 '너의 획득은 나의 상실'이라는, 따라서 내가 낫지 못하는 것은 네가 나았기 때문이라는 상대에 대한 부정적 정서와 적대적 관계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와 같은 운명론과 복음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첫째, 운명론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고 복음은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찾아갈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병자를 주목하시고 찾아가셨던 것이다. 둘째로, 운명은 현상이고 복음은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물의 움직임과 같은 현상이 아니라 말씀으로 그를 고치셨다. 셋째, 그러므로 복음은 '합계 0'이 아니고 '윈윈(win-win)'이다. 네가 나았기 때문에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네가 나은 것은 나를 고쳐주실 증거이다.
 
우리 사회에 역술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가 10만명이 넘고 그 경제 규모가 1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믿을 만한지는 모르나 한 역술인이 낸 책에는 고객의 30%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적고 있다. 운논풀과 같이 운명론의 얼마간의 과학적 근거가 얼마간 설명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부정적이고 비-복음적 요소를 더욱 경계해야 할 때이다.

곽재욱목사 / 동막교회 ㆍ 장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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