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회 김형모 목사, 제50회 김세진 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제49대, 50대 총회장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7월 13일(금) 19:46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제49회  김형모 총회장

김형모(金炯摸,1906-1980)목사는 전남 광양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부모는 광주 선교부에서 사역하던 오웬(C. C. Owen,오원 또는 오기원)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순천 매산학교에 진학을 하였으며,다시 상경하여 피어선성경학교에서 3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다시 전주신흥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평양으로 진출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3년간 교육을 받고 다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했다. 1938년 졸업과 동시에 그해 가을에 순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벌교읍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의 길에 다시 나서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출국을 당하는 변요한선교사 송별 시,순천 역에 나가 송별식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순천 경찰서에 수감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바로 순천지방 15인 사건으로 모두 구속이 되어 이때 김형모도 구속이 되었다. 여기에 구속되었던 15인에 대해서 그동안 교회에서 설교했던 노트를 모두 압수하여 분석한 결과 김형모목사는 중일전쟁을 비판한 설교 내용이 문제가 되어 결국 형을 받고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일로 1년간 옥살이를 하고 출감했지만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비록 목회는 하지 못했지만 야산에 등산을 하면서 그 곳에서 바위를 붙잡고 기도하는 일이 그의 생활 전부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해방을 만나자 곧 순천으로 나와 순천성경학교의 문을 열고 농어촌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큰 꿈을 심어 주면서 성경공부에 열중했다. 이렇게 활동하고 있을 때 일제말엽에 철수 했던 선교사들이 속속 순천에 모여 들자 이들 선교사들의 협력으로 1948년 미국 애틀란트에 자리잡고 있는 콜럼비아신학교에 2년간 유학을 하고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귀국 즉시 순천 매산중고등학교 교장의 직책을 맡아 청소년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 후 다시 광주에 있는 호남신학교 2대 교장을 역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제50회 김세진 총회장

김세진(金世鎭,1906-1987) 목사는 평안북도 용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으며,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선천 신성중학교에 진학했다. 졸업을 하면서 1924년에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순종황제가 서거하자 마지막 황제를 보낸다는 심정으로 많은 학생 시민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때 연희전문학교 학생 1백5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제는 곧 용산에 있는 조선군 사령부에 연락을 해서 일본 헌병과 일본 경찰관까지 동원해 만세를 부른 모든 학생을 순식간에 체포하여 구속시키고 말았다. 이때 김세진도 구속이 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김세진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만세를 부른 일에 대해서 당당하게 항변하고 나섰다. 이 일로 김세진은 2년간 형을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이 되었다. 그는 감방에 있으면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갔으며,여기서 은혜를 받고 출소를 하자 곧 바로 연희전문학교 복학을 하고,1930년에 졸업하면서 1931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김세진은 전도사의 신분으로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안동(현 단동)에 있는 중앙교회 전도사로 사역했다.

1935년 3월 신학교를 졸업한 김세진은 그해 가을에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8ㆍ15 해방이 되자 곧바로 용암중앙교회에서 시무를 하다가 다시 임지를 옮겨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시무했다. 그러나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목회자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무렵 6ㆍ25 전쟁으로 평양은 불바다가 되었으며, 미군이 상륙하자 다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1년 1ㆍ4 후퇴가 시작돼자 김세진목사를 비롯해서 연화동교회 교인들이 다 함께 월남하여 제주도까지 이주하게 되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피난민을 모아 놓고 사역을 하다가 부산으로 이동하여 평안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권연호목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부산 창신교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상경하여 창신교회에서는 동대문에 동신교회를 분립하자 이 교회는 김세진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고 돌집으로 교회를 잘 완성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