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마음

[ 논단 ] 톨레랑스

손달익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7월 06일(금) 11:46
주간논단 

세상이 각박하다보니 그 누구도 넉넉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살지 못하게 된 지 꽤 여러 해가 된듯하다. 조금이라도 물러서고 양보하면 내 설 자리가 없어질 듯 불안감이 휩쓸고 여유를 부렸다가는 뒤처지기 십상이라는 조바심에 너도 나도 이를 악물고 발악하듯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는 것이 그리 산다고 하여 반드시 성공하고 내 삶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며 우리 공동체가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이렇듯 갈등이 심화된 적이 없었다. 우리 안에 지역 갈등이 여전하고 세대 간의 극명한 견해 차이가 있고 계층 간에도 갈등은 시한폭탄처럼 자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좌우의 편 가르기가 극심해 지면서 이념갈등의 골도 깊어만 간다.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어느 편의 말에도 논리는 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 생산적 합일의 결과를 만들지 못하고 파괴적이고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가슴 아프다. 그래서 더 자극적인 용어들이 등장하고 더 폭력적인 의사표현 방법들이 상식처럼 확산되고 있다.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 안의 일도 그런 양상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느껴짐이 우리를 더 당혹스럽고 마음 아프게 한다. 총회 서기로 봉사하다가 여러 해를 지나 다시 임원으로 섬기게 되면서 크게 놀라고 슬픈 일들이 있다. 송사가 너무 많고 각종 시비를 가리는 일들이 너무 많이 총회에 제기된다는 점이다. 매 달 모이는 임원회 때마다 각종 재판에 관한 사항,헌법 해석 요청,규칙 논쟁 등이 가득 가득 상정된다. 재판을 해도 승복하지 않고 세상 법정으로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두 사정이 있겠고 오죽하면 그리할까마는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 교리와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물러설 수 없는 근본에 관한 시비이면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저항하고 투쟁해야 하지만 나머지 일들은 내가 물러서고 평화를 만들고 내가 나를 비우고 다른 이를 충족시키는 것이 신앙의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는 각박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물러서면 정말 낭떠러지일까? 양보해 버리면 정말 난 죽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지금껏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바이고 우리가 살면서 겪은 바이다. 해법은 달리 없다. 우리가 좀 더 넓은 마음과 큰 생각으로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방법도 그러하다. 작은 이해관계에 매여 작은 이익에 집착하면 말 그대로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게 된다. 교회란 모름지기 세상 모두를 품고 사랑해야 하고 계층과 세대를 나누어 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한 편을 사랑하기 위해 다른 편을 버리는 세상의 사랑 방정식이 아니라 모두를 품는 큰 가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우리 총회의 포용성과 통전성을 참으로 소중한 전통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진보와 보수 모두를 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통성의 표현이며 이 시대를 구원할 가치라고 믿는다. 미국 건국 조상들(Foundation Fathers)이 이상적 국가모델을 모색하다가 네덜란드를 닮고 싶은 모델로 설정했다는 역사는 매우 교훈적이다. 그들이 보았던 것은 네덜란드의 포용성,소위 톨레랑스였다. 강력한 칼빈주의 사회였으면서도 망명자들의 천국으로 불릴만큼 관용과 포용의 폭이 넓었다. 데카르트,존 로크,스피노자 등이 이곳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철저한 장로교회 지역이었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이 포용성에 바탕한 국가건설을 그들은 원했고 그것이 성공의 한 축이었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언론사의 대표는 자신이 타종교인임을 밝히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대인의 풍모를 보이신다면 민족의 역사가 바뀔 것"이라는 말을 던졌다. 의미심장한 충고로 들렸다. 좀 여유를 가지고 넉넉한 마음을 품고 이웃을 대하고 세상을 접하면 나도 행복하고 이웃도 즐거워 질 수 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은총의 바다 위에 있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각박하게 작은 이익에 집착해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우리는 주 안에 있다.


손달익목사/부총회장ㆍ서문교회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