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해 유학을 연장하다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향유 가득한 옥합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6월 26일(화) 16:51

그런데 가는 도중에 큰일이 벌어졌다. 실수로 그 장조림을 잔디밭에 쏟은 것이다. 아마도 어두운 밤길을 가다가 발에 무엇이 걸렸던 것 같았다. "어이쿠"하면서 팔에 끼고 있던 커피 병이 땅에 떨어졌고 병마개가 열리면서 그 속에 있는 고기와 국물이 사방에 흩어져 버렸다. 잔디밭에 장조림 국물이 흥건하게 배어들었고 고기는 이리저리 흩어져 버렸다. 한밤중에 당황한 학생들이 손으로 고기를 막 주워서 다급하게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그랬던 것 같다. 그 짜디짠 장조림을 맨 입으로 다 먹어 치웠으니 그 다음에 그들의 몸 상태가 어찌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세 사람은 배탈이 나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했고 그 이튿날까지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하고 기숙사 방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1964년 5월 18일 나는 리치먼드 장로교 기독교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기독교교육대학원 졸업식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한국의 서울여자대학이 나를 청빙하고자 연락을 해 왔다. 교목실의 교목으로 오라는 청빙이었다. 이때 정신학원의 김필례 선생님도 나에게 청빙 관련 연락을 주셨다. 그동안 김 선생님은 정신학원의 이사장이 되셨다. 김필례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사회가 나를 교장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것과 교장으로 일하려면 중등교육 행정학 석사 학위가 필요하니 그 과정까지 다 마친 다음에 귀국하라고 권면해 주셨다.
 
정신여자중ㆍ고등학교의 교장이 되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뜻밖의 기쁨이고 희망찬 장래를 밝혀주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사장 김필례 선생님이 나를 밀어 주신다는 점이 참으로 든든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유학생활을 더 연장해야 한다면 선생님의 권면을 사양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으로도 유학생활은 할만큼 충분히 했다고 보는데 그 고생을 한 번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 유학 온 만학도로서 짧은 영어로 수업을 듣고 학기말 보고서를 작성하고 학위를 받기까지 정말이지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대학원 과정에서 C학점이 하나라도 나오면 학위를 받지 못하기에 나는 항상 초긴장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러면서 몸이 많이 야위었다. 몸무게가 47킬로그램 정도로 줄어들었다. 공부 이외에 다른 곳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이 달려온 유학생활이었다. 미국 유학이 그렇게 진행되어 왔기에 지금 서울여자대학 교목실의 제안을 받은 나는 보다 더 쉬운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김필례 선생님의 권면 쪽으로 사리판단의 무게중심을 두려 했던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장래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깊이 기도한 끝에 김필례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순종하기로 결단한 이후 나는 미국에서 또 한 번 더 학위과정의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야 했고 가파른 산도 넘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김필례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을 추천해 주시며 그 대학의 대학원으로 가서 중등교육행정학 석사 과정에 입학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또 장학금은 미국 친구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하셨다. 1964년도에 한국 정부가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해외송금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때문에 한국에서 나의 장학금을 모금하는 일은 도무지 엄두조차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의 사범대학 입학 허가서가 나왔다. 이제 남은 숙제는 장학금이었다. 그 대학에서 교육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기까지 약 일 년 동안 드는 비용은 1만 달러 정도였다. 등록금과 기숙사비 그리고 의료보험이 포함된 비용이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재정을 내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불가능했으므로 장학금 받을 길이 어디에 있는지 여러군데 알아보며 기도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로 옮겨 와서 섬머스쿨을 마친 무렵이었는데, 기도하는 중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총장님을 만나 뵙고서 내 사정을 말씀드리고 장학금을 부탁드려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총장실로 전화를 걸어 비서에게 총장님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자 비서가 면담 날짜를 잡아 주었다. 약속된 면담일정 하루 전에 비서가 나에게 전화해서 그 일정을 확인시켜 주었다.
 
면담 당일 나는 총장님의 집무실로 들어갔는데 그분은 이미 한국 관련 자료를다 모아서 검토해 놓으셨다. 화폐개혁에 관한 자료도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총장님께 이 대학에서 교육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게 되면 대한민국 서울의 정신학원에서 교장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현재 한국은 화폐개혁 때문에 재정형편이 아주 어렵거니와 해외 송금도 불가능하다고 설명해 드렸다. 그러자 총장은 나의 인적사항과 신앙 및 교단소속을 물어보시고 이 대학의 이사로 있는 장로교회 교인 파인 씨가 나에게 장학금을 주도록 주선해 보겠노라고 약속하셨다. 얼마 뒤 총장실에서 장학금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너무나 반갑고 기쁜 나머지 나는 총장님을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따로 인사할 필요는 없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독려해 주셨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새로 시작한 나는 리치먼드 교육대학원에서 유학생활 할 때와 거의 동일하게 지냈다. 공부의 목표가 뚜렸했고 또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그 목적지가 분명했기에 나는 이 대학에서도 주어진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갔다. 석사 과정에서 중등교육행정학을 전공한 나는 두 학기를 공부하고 그 이전에 미리 섬머스쿨을 다닌 것이 참작되어 1976년 6월에 졸업했다.

 
이연옥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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