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이원영 목사, 제40회 한경직 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6월 12일(화) 16:16

 제39회 이원영 목사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는 경북안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유교적 가풍을 지닌 가정에서 퇴계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 한말을 맞이하면서 퇴계의 사상을 연구하는 일보다는 실용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부모의 뜻에 따라 1908년 사립 측량강습소를 졸업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을 만나자 퇴계 사상은 그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구국의 길은 어떤 것일 까 깊은 고민에 잠기고 만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향교로 달려갔다. 유생들은 여전히 사서오경을 외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데 이때 이원영은 문을 박차고 향교에 들어가 서울에서 일어났던 3. 1운동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나서 곧바로 "우리들도 만세를 부릅시다"라고 하자 이원영은 그 중 몇 사람을 서울로 파송을 하여 '독립선언서'를 구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유생들은 태극기를 열심히 그리기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안동 장날을 기하여 유생들을 중심이 되어 모든 유생들이 만세를 부르고 길거리로 나가 마음 것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이원영은 안동지방의 만세 주동자로 밝혀지자 곧 체포하라는 명령이 있자 일경은 곧 바로 이원영을 체포하여 곧 안동경찰서에 수감을 하였다. 그런데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던 어느 재소자의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어 감방에서 성경책을 읽으면서 진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예수의 족보에 속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름으로 알고 출감 후 즉시 안동성경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교육을 받은 후 다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1930년에 졸업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영주중앙교회를 비롯해서 안동 안기교회, 신세랑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9년 5월 신사참배를 거절했다하여 안동경찰서에 몇 차례를 수감을 하였다. 그러나 해방을 맞이하여 출옥 후 안동 서부교회를 재건하고 그 교회에서 성실하게 목회한 결과로 1954년 4월 안동교회에서 모이는 제39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때 그는 신사참배를 결의를 취소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제40회 한경직 목사

 
한경직(韓景織, 1902-2000) 목사는 평안남도 평원에 있는 깊은 산골에서 출생하였다. 이 깊은 산골에 추운 겨울 어느 날 마포삼열 선교사와 한석진 조사가 반작교회의 설립이 되었다. 이때 한경직도 부모를 따라 첫 기독교와 접히고 되었다. 이 무렵 반작교회에서 진광소학교를 운영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한경직은 이 학교에 입학을 하여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 후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당(이승훈 장로가 설립)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중학교 과정을 이수한 후 조만식 교장의 추천으로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면서 방위량 선교사의 가정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방위량 선교사는 한경직의 근면성에 놀라 미국에 있는 엠포리대학과 그 유명한 프리스톤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졸업할 무렵 뜻하지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나님 3년간 만 고국에 가서 목회 할 수 있도록 허락 만 해 달라"고 호소를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 소리를 듣고 응답하셨다.
 
1932년 귀국하여 신의주 제2교회에 담임교역자로 사역을 하던 중 그의 설교 소리가 신의주 전체에 널리 알리어지면서 3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을 시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38년 9월 총회에 출석을 하여 심사참배를 결의하는 데 그만 참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제는 신사참배 결의에 함여를 하였지만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제는 그를 미국 제국주의 앞잡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추방을 시키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신의주 남쪽에 보리원을 설립하고 고아사업을 하던 중 해방을 만나게 되었다. 얼마동안 그곳에 해방된 조국애서 일을 하려고 하였지만 소련 군 진주로 그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여 월남하여 현재 영락교회 자리에 일본인 천리교 자리에 영락교회 간판을 부치고 오늘의 영락교회를 만들어 놓았다. 그는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2010년 1월 KBS. TV에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을 프로를 제작하여 반영을 하여 전 국민에게 그의 청빈한 삶을 방영하기도 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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