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사건들 IV 빈 방 있습니까? 성인 연극?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 방 이야기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6월 12일(화) 16:10

물론 의도한 건 아니지만 '빈 방 있습니까?'라는 제목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지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무슨 성인연극의 뉘앙스를 풍긴다거나 에로물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실제 대학로 뒷골목의 몇몇 소극장에서는 연중무휴로, 그것도 하루에 대 여섯 차례씩 릴레이로 성인연극이 공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은 스타급으로 성장한 어떤 배우는, 그래서 스승으로부터 '빈 방'출연을 권고 받고는 평소 존경해왔던 은사에게 크게 실망했었단다.
 
"나한테 왜 그러시지? 난 아직 그런 연극을 해야 할 만큼 때 묻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대본을 받아 본 그는 그 후 두 해를 '빈 방' 공연에 참여하여 열정적으로 연기를 했고 스스로 '빈 방'의 매니아가 됐다. "전 이 작품을 위해서라도 스타로 뜨겠습니다!"(그 의지대로 그는 스타가 됐다. 그러나 막상 유명해지고 보니 영화나 TV 드라마로 바빠지면서 '빈 방' 무대에 설 수 없게 됐다.)
 
어느 해인가, 약간의 취기를 느끼게 하는 수상한 중년남자 댓 명이 극장 앞을 서성거리며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매표소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저, 이거... 야해요?"
 
매표소 안에 앉아있던 기획자가 지혜롭게 대답했다.
 
"후회 안 하실 걸요."
 
질문이 대담해졌다.
 
"혹시 여관장면 나와요?"
 
"물론이죠."
 
거짓말이 아니었다. 분명히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을 찾는 장면이 있으니까.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열어 가장 비싼 현장판매용 성인정액권을 샀다. 극장 안으로 들어온 중년 샐러리맨들은 적당히 오른 취기 속에서 객석에 등을 기댄 채 뭔가 잔뜩 기대하면서 개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막이 오르며, 고등학교 아이들이 수다를 떨고, 연출 선생님이 들어와 배역을 발표하고, 아이들이 반대한다. 선생님이 야단을 치고 연습이 시작된다. 바보 덕구가 대사를 더듬거리고… 이제나 저제나 야한 장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그들은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을 터이다. 그러나 극이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극에 점점 몰입된 그들은 마침내 여느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퇴장할 때 그들은 정신지체아 교육기관의 원생들이 만든 수제 크리스마스카드를 듬뿍 사면서 잔뜩 붉어진 눈시울로 기획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은 잘 지은 것 같다. 다른 생각으로 들어왔다가 은혜 받고 나가는 관객이 있다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또 한 번은 한 여름에 극단으로 '빈 방' 애호가 한 분의 전화가 걸려왔다.
 
"올해는 '빈 방' 일찍 시작하시네요?"
 
"네? 무슨...?"
 
"포스터 봤어요. 대학로에 좍 붙었던데."
 
"그럴 리 없어요. 아시다시피 '빈 방'은 성탄절기 연극인데 여름에 할 리가 있겠어요?"
 
"아닌데? 분명히 봤다구요."
 
얼른 대학로로 나가 살펴봤다. 세상에! 남녀의 다리가 위 아래로 포개져 있는 포스터가 뒷골목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쓰러지는 줄 알았다. '빈 방 있습니다'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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