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김재석 목사, 제38회 명신홍 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6월 01일(금) 16:38

 제37회 김재석 목사

 
김재석(金在錫, 1900-1959) 목사는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배유지 선교사가 설립한 숭일학교 고등과에 진학을 하여 3년간 교육을 받았다. 당시 타마자 선교사 교장의 영향을 받고 목사가 될 마음을 가졌다. 학교 경건회 시간마다 선교사들의 외친 내용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억압받고, 자유가 없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기독교인들이 할 일이라고 강조를 하였다. 이때 김재석은 속으로 결심하기를 "나도 선교사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억압 받고 있는 우리 조선 동포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내가 할 일이라고 결심하고 목사가 되어야지"라고 몇 번이고 혼자서 결심을 하였다. 그 결과로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1930년 6월(제25회) 졸업을 하였다. 곧 고향 가까운 전남 광산군 송정읍교회의 청빙으로 1931년 봄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송정읍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목사를 청빙하는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그의 교역에 힘을 보태주었다.
 
이 일로 김재석 목사는 1935년 목회를 잘 한다는 소문이 황해도 신천읍까지 알리어 졌으며, 이 일로 신천읍내에 있는 온천교회의 청빙을 받고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로 목회지를 옮기게 됐다. 이 교회에서 4년간 목회를 하고 1939년 12월 신천읍 동부교회에 시무를 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해방을 맞이하자 남북이 나누어지면서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을 하고 있었으며, 남한은 미군이 점령을 하였다. 그런데 북한은 소련군의 힘을 얻었던 북한 공산당들은 교회를 탄압하였다. 어용 목사가 되기 싫어서 할 수 없이 교인들을 그대로 나두고 1947년 10월 가족을 이끌고 소련군과 인민군이 경계를 극심하게 지키고 있어서 몇 차례 월남을 시도 했지만 실패를 하였다. 할 수 없이 북한 인민군에게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안내원의 인도를 따라 야밤에 무사히 38선을 넘어 왔다. 김제석 목사는 월남에 성공을 하고 북쪽을 향해서 신천읍 서부교회 교인들에게 몇 번이고 사제의 기도를 하는 등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고향 광주 제일교회에 부임하여 고향에서 목회를 하면서 지역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제38회 명신홍 목사

 
명신홍(明信弘, 1905-1975) 목사는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을 하였다. 그는 네 살 때 어머니의 인도에 따라 개네루 교회에 출석을 하였다. 그 후 평양 숭실중학교에 진학을 하였으며, 중학과정을 이수했던 명신홍은 일본 동경에 있는 일본대학 철학과에 진학을 하고 졸업 후 잠시 모교인 숭실중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던 중 선교사의 권유를 받고 평양 장로회신학교 본과에 진학을 하였다. 그의 실력에 놀란 선교사들은 1936년에 졸업을 하자 미국 선교부에서 연락을 하여 미국교회의 장학금으로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국 유학생 생활이 너무 감사하여 열심히 연구하던 중 다시 1937년에 칼빈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1939년에 신학석사학위를 다시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해방을 만나자 명신홍은 즉시 해방된 조국에 가서 봉사해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을 때 대구 서문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다. 때 마침 총회에서 대구에 총회신학교를 개설하자 이때 그는 실천신학 교수로 출강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한편 그가 사역하고 있던 서문교회는 3천여 명이 넘는 교회로 부흥 성장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59년 9월 대전 중앙교회에서 모이는 총회에서 합동측과 통합으로 분렬이 되자 명신홍 박사는 신학의 노선을 따라 합동측으로 적을 옮기어 갔다. 이러한 관계로 남산에 있던 총회신학교는 WCC를 지지하는 지도자들은 통합에 남게 되고 역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을 하였다. 그로나 NAE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용산에 있는 4층 건물에서 공부하는 총회신학교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명신홍 박사는 총회신학교에서 교수로 연구를 하게 되었다. 1965년 때 마침 총회신학교는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재직을 하다가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하자 그의 신학 노선을 지키고 갈 학자는 명신홍 박사 밖에 없다고 판단을 하였기에 총회신학교 이사회나 합동측 총회에서 그를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추대를 하였다. 그는 분열되기 전 예장 제38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